<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시조 박혁거세 관련하여 신기한 기사가 나온다.
왜인(倭人)이 병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려 했는데,
시조(박혁거세)가 신령한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갔다. (B.C. 50년)
말도 안 되는 기사이긴 하지만 신라 초기부터 왜(倭) 즉 고대 일본과의 연관을 상징하는 내용이다.
뿐만 아니다. 신라 초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아예 왜의 출신들도 은근히 있다.
석탈해(昔脫解)가 왕(尼師今)이 되었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 1천 리에 있다.
호공(瓠公)은 그 족성(族姓)을 자세히 알 수 없는데,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瓠)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에 호공이라고 칭하였다.
더욱이 왜병의 신라 침공은 역사 내내 반복된다. 왜국이 일본으로 국명을 확정짓기 전까지의 신라 침공 기록만 모아보아도 이 정도나 된다. (참고로 이는 <일본서기>의 믿기 힘든 기록은 제외하고 <삼국사기>의 기록만 모아본 것이다.)
(14년)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6부(部)의 정예 병사를 동원하여 막았다.
(73년) 왜인이 목출도(木出島)를 침략하니, 왕이 각간(제1등급) 우오(羽烏)에게 막게 하였으나, 패하여 우오가 전사하였다.
(121년 4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208년 4월) 왜인이 국경을 침범해 왔으므로, 이벌찬(제1등급) 석리음(昔利音)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왜인을 막게 하였다.
(232년 4월) 왜인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金城)을 포위하였다. 왕이 몸소 나가 싸우니 적이 패하여 도망갔다. 경기병(輕騎兵)을 보내 도망가는 왜군을 추격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33년 5월) 왜병이 동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233년 7월) 이찬(제2등급) 석우로(昔于老)가 사도(沙道)에서 왜인과 싸웠는데, 바람의 방향을 따라 불을 놓아 적의 배를 태우니, 왜적이 바다에 빠져 모두 죽었다.
(253년 4월) 왜왕이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공격해왔다.
(287년 4월) 왜인이 일례부(一禮部)를 기습해 왔는데, 불을 질러 태우고는 1천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292년 6월) 왜병이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해 함락되니, 왕이 일길찬(제7등급) 대곡(大谷)에게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도와주어 되찾도록 명령하였다.
(294년 여름) 왜병이 장봉성(長峯城)을 공격해 왔으나 실패하였다.
(346년) 왜병이 갑자기 풍도(風島)로 쳐들어와 변방의 백성들을 노략질한 후 더 진격하여 금성을 포위하고 강하게 공격하였다. (중략) 적군의 식량이 모두 떨어져 장차 퇴각하려 하자, 왕이 이벌찬(제1등급) 강세(康世)에게 명령하여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쫓아가 공격하여 도망치게 하였다.
(364년 4월) 왜병이 대거 이르렀다. 왕이 이를 듣고 대적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여 (중략) 정예 군사 1천 명을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매복시켰다. 왜인이 무리가 많음을 믿고 바로 나아가니, 매복한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인이 대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393년 5월) 왜인이 와서 금성을 에워싸고 5일 동안 물러나지 않았다. (중략) 적이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가자, 왕이 정예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000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였다. 그렇게 협격하여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405년 4월) 왜병이 와서 명활성(明活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의 남쪽에서 잠복하였다가 두 번 싸워 그들을 깨부수고 3백여 명을 죽여 그 목을 베었다.
(407년 3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415년 8월)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이겼다.
(431년 4월) 왜병이 동쪽 변경을 침입하여 명활성을 포위하였는데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갔다.
(440년 여름)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사람을 노략질해서 돌아갔다. 6월에 또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444년 4월) 왜병이 금성을 10일 동안 포위하였는데 군량이 다 떨어지자 돌아갔다. 왕이 (중략)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독산 동쪽까지 추격해 맞붙어 싸우다가 적에게 패하여 장수와 사졸 가운데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왕이 허둥지둥 말을 버리고 산에 올라가자 적이 몇 겹으로 에워쌌는데 (중략)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459년 4월) 왜인이 병선(兵船) 1백여 척으로 동쪽 변경을 습격하고 나아가 월성(月城)을 포위하니 사방에서 화살과 돌이 빗발쳤다. 왕이 성을 지키자 적들이 장차 물러나려 하였고,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그들을 패배시켰다. 북쪽으로 추격하여 바다 어귀에 이르니 적들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462년 5월) 왜인이 활개성(活開城)을 습격해 깨뜨리고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463년 2월) 왜인이 삽량성(歃良城)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왕이 벌지(伐智)와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길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물리쳤다. 왕은 왜인들이 자주 영토를 침입하였으므로 변경에 두 성을 쌓았다.
(476년 6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하여 공격하고 물리치니 2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477년 5월) 왜인이 군사를 일으켜 다섯 길(五道)로 쳐들어왔지만 결국 성과 없이 돌아갔다.
(482년 5월) 왜인이 변경에 쳐들어왔다.
(486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497년 4월) 왜인이 변경에 쳐들어왔다.
(500년 3월) 왜인이 장봉진(長峯鎭)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흥미로운 부분은 그 시점이다. 거의 대부분 여름에 몰려 있는데, 특히 초여름인 4월이 거의 절반에 달한다. 무언가 계절적인 요인이 분명 있어 보이는데 정확한 사정은 밝혀져 있진 않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게 봄이 80%를 차지하고 있고, 그 중 3월이 거의 절반이다. 거칠게나마 정리해보자면, 말로 안 되면 칼을 빼드는 패턴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실제 공격이 이루어진 것 외에도 왜의 공격이 예견되는 상황과 그에 대비하는 일도 더러 발생했다.
(122년 4월) 수도 사람들에게 소문을 잘못 퍼져서 “왜병이 대규모로 온다”고 하니, 사람들이 다투어 산골짜기로 숨었다. 왕이 이찬(제2등급) 익종(翌宗) 등에게 명하여 사람들을 타일러서 그치게 하였다.
(289년 5월) 왜병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박을 손질하고 갑옷과 무기를 수리하였다.
(408년 2월) 왕이 왜인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어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보다 먼저 우리가 정예 군사를 뽑아 적의 군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후략)
(493년 7월) 임해진(臨海鎭)과 장령진(長嶺鎭)의 두 개 진을 설치하여 왜적(倭賊)에 대비하였다.
이를 보면 신라인들도 대략적으로 왜인들이 여름 무렵에 침공해온다는 패턴을 알고 있었기에 봄과 여름에 특히 이를 신경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얼마나 신라인들이 왜병의 침공으로 시달렸던지 한번은 선제적 대응을 검토하였던 적도 있었다.
(295년 봄) 왕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왜인이 여러 차례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백제와 협력하여 일거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를 공격하는 방안은 어떻겠소?” 이에 서불한(제1등급) 홍권(弘權)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해상 전투에 익숙하지 않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원정하는 것은 무모할 듯합니다. 더욱이 백제는 잘 속이고 또 항상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이 있어서 함께 하기 어렵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왜국의 신라 침공 기사들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가장 정확하게는 금석문에서도 이러한 정황을 알리는 사실이 있다면 그만큼 신뢰도가 높아질 것이다. 이제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비(廣開土王陵碑)를 살펴보자.
(391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399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순행하여 평양으로 내려갔는데,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께 아뢰었다. “왜인이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城池)를 부수고 저희를 왜의 백성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왕께 귀의하니 구원해주시길 청합니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워 그의 충성을 훌륭하게 여겨, 특별히 사신을 보내 돌아가게 하고, …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400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가서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왜가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자 성이 곧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안라인(安羅人) 수병(戍兵) … 신라성 … 왜가 … 크게 무너졌다. 69개의 성을 모두 지키고 … (후략)
(404년) 왜가 따르지 않고 대방(帶方)의 경계를 침범하였다. (중략) 왕의 군대(王幢)가 요해처를 끊고 소탕하니, 왜구가 무너져 패배하여 참살한 자가 수를 셀 수 없었다.
이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동북아시아 최강국 고구려 입장에서는 신라는 그저 일개 약소국일 뿐이었고 왜 역시 변방을 소란케 하는 이질적 존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천하관에서 자신들에게 부속되어 온 신라를 괴롭히는 왜는 척결의 대상이었기에 실제로 대군을 파병해 물리쳤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고구려 입장에서 어느 정도 사태를 부풀려 전하고 있을 개연성도 있으니 여기서는 그 흐름만 받아들이도록 하자.
그런데 이 무렵 실제로 얼마나 신라가 허약했는지는 <삼국사기>의 다음의 기사가 크로스체킹 해주고 있다. 보다시피 고구려에 인질을 보내던 것과 마찬가지로 왜국에게도 그러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392년 1월) (나물)왕은 고구려가 강성하였기 때문에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401년 7월)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이 돌아왔다.
(402년 3월) (실성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나물(奈勿)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삼았다.
(412년) 나물왕의 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418년 1월) (눌지)왕의 동생 복호가 고구려에서 나마(제11등) 제상(堤上)과 함께 돌아왔다.
(418년 가을) 눌지마립간의 동생 미사흔이 왜국에서 도망해 돌아왔다.
미사흔과 복호의 경우는 그 유명한 박제상(朴堤上)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당시 신라보다 우위에 있던 백제조차도 왜국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야 했을 정도였으니, 이 기사 자체의 신빙성을 문제 삼기는 어려울 것이다. 즉 신라는 이 당시 왜국에 비해서 문화적으로는 앞섰을 지 몰라도 군사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약체였음이 분명하다. 이는 제3자인 중국측 기록으로 또 다시 팩트체크를 해볼 수가 있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유송(劉宋, 420~479)부터 남제(南齊, 479~502)에 이르기까지 일명 왜5왕이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이들은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라는 이름의 왜국 왕들인데, 주로 중국의 남조 왕국과 외교를 하면서 이름이 남게 된 케이스이다. 다만 <일본서기>에는 이들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은 혼슈 본토의 왜국이 아니라 규슈 지역의 또 다른 왜국이 아닐까 짐작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들 중 진왕, 제왕, 무왕 세 명의 외교 기록이 중요한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신라를 포함하여 자신들의 지배 영토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것이다.
우선 438년 진왕이 먼저 유송측에 자신을 이렇게 임명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
使持節 都督,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한국인들은 자존심상 결코 인정하기 어렵지만 실제로 이들이 주장한 바가 그렇다는 것이니 오해는 없기 바란다. 어쨌든 유송도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고 안동장군(安東將軍) 왜국왕까지만 인정해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451년에 제왕에게 유송측에서 자신들과 외교관계가 있던 백제는 제외하고 대신 가라(加羅), 즉 가야를 집어넣어 최종적으로 왜국왕측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장군, 왜왕
使持節 都督,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六國諸軍事, 安東將軍, 倭王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 왜국 왕인 무왕이 478년에 재차 백제까지 포함시켜서 7국의 리더로 또 다시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
使持節 都督,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七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이를 받아든 유송측도 많이 당황하였던 모양이다. 이들도 고민 끝에 또 다시 백제만 제외하고 다음과 같이 왜국에 회신을 하였다.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
使持節 都督,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결론은 외교에 공을 쏟은 왜국측의 지역 내 우위를 국제적으로 인정해준 것이다. 여전히 신라 등 한반도 남부의 각국을 왜국 아래에 두는 것을 공인해준 셈이었다. 정확히는 실질적 지배-피지배 관계가 아니라 국제질서상 힘의 상대적 우위를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하면 대략 맞을 것이다.
어쨌든 이처럼 당시 신라는 고구려에도 압도당하고 있었고 백제에도 열세였음은 물론 심지어 왜국에까지도 치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고구려와 왜국에는 인질도 보내야만 했는데, 왜국의 빈번한 침공에는 수세적으로만 대응이 가능하였을 뿐 왜국 본토로의 역공은 제대로 시도한 적조차 없었다. 솔직히 신라는 진한 지역 내에서는 작은 맹주 역할을 하고는 있었지만 국제 관계에서는 약소국이었음이 분명하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팩트로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라와 왜국이라는 이웃나라간에 서로 분쟁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빈도는 적지만 화친을 맺고 사신을 교환하는 사례도 분명 존재했다.
(59년 5월)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123년 3월) 왜국과 강화하였다.
(158년 3월) 왜의 사신이 예물을 가지고 방문하였다.
(173년 5월) 왜의 여왕 히미코(卑彌乎)가 사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보냈다.
(253년 초경)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객관에 머물렀다.
(300년 1월) 왜국과 사신을 교환하였다.
(312년 3월) 왜국왕이 사신을 보내 아들을 위해 혼인을 청하니, 아찬(제6등급) 급리(急利)의 딸을 보냈다.
(344년 2월) 왜국이 사신을 보내와 혼인을 청하였으나, 왕의 딸이 이미 결혼하였기에 거절하였다.
(345년 2월) 왜왕이 서신을 보내 국교를 끊었다.
(402년 3월) 왜국과 우호 관계(화친)를 맺고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삼았다.
참고로 신라에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조직이 있었는데, 621년에 영객전(領客典)으로 개칭하기 전까지의 그 조직명은 왜전(倭典)이었다. 왜국이 신라 입장에서는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였는지 그 이름만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영객전으로 이름을 바꾼 이후에도 이 왜전은 별도 조직으로 존속되었다. 그만큼 신라의 왜국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 이슈였는지를 말해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웃나라라는 관계의 특수성에 따른 여파도 간혹 있었다. 예컨대 왜국에 크게 흉년이 들었을 때 국제적인 난민 발생 이슈에는 신라도 그 영향을 받았다. 사례는 한 번뿐이지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만큼 작은 규모로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게 분명하다.
왜인들이 큰 기근을 겪어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1천여 명에 달하였다. (193년 6월)
이렇듯 이웃나라는 서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이다. 이 두 국가의 관계에서 힘의 절묘한 균형점을 찾는 시점은 신라가 삼한통일을 이룬 후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시 한번 알아볼 예정이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광개토대왕비, 일본서기, 남제서, 송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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