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백제 멸망, 663년 백제 부흥운동 실패, 668년 고구려 멸망. 7세기의 한반도는 신라가 초강대국 당나라를 끌어들여 초래한 연쇄적인 국제전으로 인해 말 그대로 초토화가 되었다. 신라가 생존을 위해 벌인 일생일대의 도박은 그 여파가 너무도 컸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고구려까지 포함하여 삼국통일을 완수하겠다는 그런 의지 따위는 신라에 없었다. 이웃한 두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대 최고 강대국의 도움이 필요했을 따름이었다. 당나라의 지원군은 결코 순수한 의도로 한반도의 약소국 신라를 돕기 위해 굳이 외국 영토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그 동안 골머리를 썩어온 강대국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서 그들 배후의 지원 세력이 필요했을 뿐이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이들은 합심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대로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당초 이러한 동맹이 성립하게 된 배경이었던 고구려와 백제 땅을 서로 나눠갖는다는 이면 협의는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과 각자가 감춰둔 이기심 앞에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누가 먼저 배신의 칼을 빼어드는지는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해 연말에 당나라의 잔여병력이 신라를 기습하려 한다는 동향을 신라도 확인하였다. 이에 신라의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김법민(金法敏, 626~681)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대응군을 준비하였다. 백제의 영토와 유민들을 흡수하기 위해 나선 것도 그 일환이었다. 문무왕은 백제 멸망의 꿈을 이룬 아버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 김춘추(金春秋, 604~661)의 뒤를 이어 곧바로 전쟁에 참전하여 백제 부흥군을 제압하고 고구려까지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 역전의 명수였다. 그는 당나라의 실력과 야심 둘 다 가장 잘 아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러한 반응은 당나라 입장에서는 내심 원하던 신라 정벌을 위한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다. 669년 초 당나라 고종(高宗, 재위 649~683) 이치(李治, 628~683)가 문무왕의 바로 아래 동생 김인문(金仁問, 629~694) 등을 불러서 따지듯이 물었다.
그대들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우리 군사를 요청해 놓고는 어째서 다시 우리를 치하려는 것이오?
한 마디로 직전까지의 동맹군을 공격할 명분을 쌓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상대방이 먼저 움직였으니 국제적인 의리를 저버린 것에 대한 죄가를 묻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공식적으로 신라 정벌군 준비에 착수하였다. 김인문도 급히 비밀리에 신라 정부에 이러한 동향을 알렸다.
그해 5월 신라는 급찬(9등급)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나라로 보내 앞서 1월에 당나라에서 요구하였던 자석 두 상자를 선물하였다. 신라로서는 강대국과의 본격적인 대결에 앞서 가급적 시간을 벌어둘 필요가 있었다. 또한 그 유명한 김유신의 동생 각간(1등급) 김흠순(金欽純)과 파진찬(4등급) 김양도(金良圖, ?~670)를 보내 당나라에 공식 사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해 겨울에는 신라의 유명한 쇠뇌 기술자인 사찬(8등급) 구진천(仇珍川)을 당나라 사신과 함께 보내주었다. 당시 신라의 쇠뇌가 수백 미터의 사정거리로 소문이 자자하였기에 시연을 위해 보내준 것이었는데, 이 역시 신라측의 유화적인 제스처였다.
670년 1월, 당 고종은 신라에서 사신으로 와 있던 김흠순은 귀국시켰지만 함께 온 김양도는 인질로 붙잡아 두었다. 신라의 전문 외교관으로서 당나라를 여섯 번이나 방문한 바 있던 김양도는 이해에 당나라의 서경 장안(長安)에서 생이 다하였다. 당 고종은 김양도를 붙잡아 둔 이유로 신라가 “백제의 땅과 유민을 취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이제 상황을 걷잡을 수 없이 틀어졌다.
두 달 후인 3월, 드디어 신라가 한때의 동맹국 당나라를 상대로 먼저 칼을 빼어들었다. 사찬(8등급)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정2품)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각 정예병 1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로 진격해갔다. 당나라군 소속의 말갈 병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도착하여 신라-고구려 연합군을 기다렸다. 이들이 전장에서 조우한 것은 다음 달인 4월 4일이었다. 이날 신라-고구려 연합군은 당나라군을 압도하였다. 전사자와 포로 모두 큰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당나라측 후속 지원군이 당도하자 연합군은 백성(白城)으로 물러났다. 대국 당나라군을 상대로 한 첫 승전은 달콤했다.

같은 해 가을 7월에 문무왕은 대아찬(5등급) 김유돈(金儒敦)을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였다. 기록에서는 백제의 잔당이 배반할까 의심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지만, 이후 백제를 토벌하였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당나라측의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였던 것을 보면 실제로는 이때 신라가 노린 것은 백제 땅에 주둔중이던 당나라군이었음이 분명하다. 처음에 웅진도독부는 백제 출신의 사마(司馬, 6품) 예군(禰軍, 613~678)을 보내와 신라의 내실을 살펴보고자 하였는데, 문무왕도 그 속셈을 꿰뚫어보고 그를 붙잡아두고는 오히려 급습에 나섰다. 결과적으로 전공은 다음과 같았다.
- 김품일(金品日), 문충(文忠), 중신(衆臣), 김의관(金義官), 천관(天冠) 등 : 63개 성 함락, 주민들을 신라로 이주
- 김천존(金天存), 죽지(竹旨) 등 : 7개 성 함락, 적군 2천 명 살상
- 김군관(金軍官), 김문영(金文穎) : 12개 성 함락, 적군 7천 명 살상, 다수의 군마와 병기 획득
물론 완벽한 전승은 아니었던 것이, 예컨대 중신, 김의관, 달관(達官), 흥원(興元) 등은 중도에 퇴각하였기에 군율대로 사형에 처하는 대신 면직시키는 것으로 처벌을 하였다. 그외에도 전장에서 뛰어난 공적을 보인 군인들에게는 급찬(9등급)의 관등을 부여하는 것으로 포상을 하였다. 이처럼 신라는 옛 백제의 땅을 상당수 웅진도독부로부터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만 신라인들끼리도 완전히 합심된 상황은 아니었던 듯하다. 670년 12월에 한성주(漢城州) 총관(摠管)으로 있던 수세(藪世)가 백제의 어떤 지역을 빼앗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웅진도독부측으로 줄을 대고자 하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일이 발각되자 신라는 대아찬(5등급) 진주(眞珠)를 보내 그의 목을 베었다.
671년 1월에 문무왕은 군대를 파병해 백제의 변방 지역으로 쳐들어가서 곡식을 짓밟게 하였다. 계절이 한겨울이었던 만큼 아마도 곡식창고가 타깃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의도된 것인지 우연찮게 그렇게 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당시 웅진도독부가 있던 웅진(熊津)의 남쪽에서 백제인과의 전투가 벌어졌다. 승패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지방관 겸 군지휘관이었던 당주(幢主) 부과(夫果)가 전사할 만큼 격전이었던 모양이다.
당나라군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소규모이지만 반격에 나선 것이다. 이번에는 말갈군이 진군해와서 신라의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하였지만 방어에 성공하였다. 그들이 퇴각하려 하기에 반격에 나서 적군 3백여 명을 참살하였다. 또 당나라에서 백제, 즉 웅진도독부를 구원하러 온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지자 대아찬(5등급) 진공(眞功)과 아찬(6등급)급의 부지휘관을 보내 옹포(甕浦) 수비를 하도록 하였다. 위치는 미상이지만 서해안의 당군 진입로를 미리 방비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해 6월, 신라에서는 장군 죽지(竹旨) 등을 파병하여 백제 가림성(加林城) 주변의 곡식을 짓밟도록 하였다. 이때는 공성전을 벌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데, 다음해인 672년 2월에 본격적으로 가림성을 공격해보았지만 함락에는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신라군의 대당 공세는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마침내 당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웠는데 5,300명을 목 베고, 백제 출신 장군 두 명과 당나라 과의(果毅, 부관급) 여섯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러한 신라군의 전공에 당나라로 놀랐던 것인지 가을 7월 26일에 당나라측의 신라 정벌군 사령관인 계림도행군총관(雞林道行軍摠管) 설인귀(薛仁貴, 614~683)가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내왔고, 이에 문무왕도 그에게 긴 답서를 보낸 것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내용이 길기에 짧게 요약하자면, 설인귀는 과거 위기에 처해 있던 신라를 자신들이 구원해주었던 사례를 강조하며 지금의 저항을 그만둘 것을 종용하는 내용이고, 문무왕은 작금의 상황을 고구려와 백제의 잔당 탓으로 돌리면서 동시에 당 태종이 처음에 신라에게 ‘평양 이남 백제토지(平壤已南百濟土地)’를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라는 내용이었다. 양측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렸기에 양국간의 전면전은 사실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670년)에 고구려 부흥군 진압을 위해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摠管)인 대장군 고간(高侃)은 동시간대인 7월에 안시성의 고구려 봉기세력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의 참전은 조만간 신라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8월경 신라는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두고 아찬(6등급) 진왕(眞王)을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지방행정구역을 재편한 것에 지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위치가 정확히 웅진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한 마디로 당나라의 웅진도독부를 압박하는 목적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곳의 책임자는 다음해에 도독에서 총관(摠管)으로 변경되는데, 어느 쪽이든 다 군사지휘관의 역할이 기본이었다. 즉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이 강조되는 지역이었다.
당시 당나라도 더 강력한 카드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신라측에서 반당 성향이 강한 고구려 유민 세력을 받아들인 것은 물론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여 지키고 있으니, 당 고종도 더 이상 못 참고 신라 정벌군을 파병키로 한 것이었다. 직후인 9월에 대장군 고간 등이 한족 기병과 번방(蕃方)의 군사, 즉 이 당시 말갈 계통의 병력까지 포함하여 총 4만 명을 이끌고 평양을 향해 남진하도록 하였다. 또한 동시에 당나라는 한반도로 보급함대를 보내왔다. 이를 신라군은 놓치지 않았다.
다음달인 겨울 10월 6일에 신라군은 당군 보급선(漕運船)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정5품)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1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전투 도중 익사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이 모두 비전투요원은 아니었던 것이, 겸이대후만 하더라도 무장의 직책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이때 그가 지휘한 선박만 하더라도 병선(兵船) 즉 전투용이었던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660년의 백제 공격 시 당나라 해군이 1,900척에 122,711명을 동원하였던 것을 참고해본다면, 보급선이었기에 병력보다는 군수물자가 더 많았겠지만 그래도 대략 70척이면 최대 4,500명까지도 승선하였을 수 있을 규모였다. 이 전투에서 승자인 신라군에서는 급찬(9등급) 당천(當千)의 공이 제일이었기에 사찬(8등급)으로 승진시켜주었다. 이 승전의 기세를 이어 다음해인 672년 봄 1월, 문무왕은 군대를 보내 백제의 고성성(古省城)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2월 백제의 가림성 공격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실패로 돌아갔다.
가을 7월, 이제 당나라의 본진이 평양에 도착하였다. 동주도행군총관 고간이 한족 병사 1만 명,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總管)으로 참전한 이근행(李謹行)이 말갈계 3만 명을 이끌고 동시에 모여들었다. 특히 이근행은 속말말갈 출신으로, 아버지 돌지계(突地稽) 대에 수나라에 집단 망명을 한 이후 대를 이어 당나라군의 선봉으로 활약해온 인물이었다. 특히나 고구려의 멸망 시 그 역시 참전하였던 이력이 있었기에 한반도 내에서의 전황은 익숙하다는 게 그의 장점이었다.
이들은 여덟 곳에 군영을 설치하고는 주변에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철저히 방비를 하면서 주둔하였다. 한 군영당 평균 5천 명씩 배치된 모양새였다. 이 다음 이들이 노린 곳은 평양의 남쪽인 옛 대방(帶方) 지역이었다.
8월에 당군은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둘 다 위치는 불명이지만 대략 평양 서남쪽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리고 당군은 더 전진하여 백수성(白水城) 앞 5백 보쯤 되는 곳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이곳을 방어선으로 삼은 신라군은 당군에 맞서 싸워 수천 명을 전사시키는 전공을 보였다. 당군이 아직 이곳 지형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에 고간 등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물러나 석문(石門)에서 방어진을 마련하였다. 신라군 역시 왕명에 따라 장군 의복(義福)과 춘장(春長) 등의 지휘 아래 추격에 나섰는데, 이들은 석문의 들판에 세워진 당군의 진영에 대응하여 대방의 들판에 진영을 꾸렸다. (신라군은 이때 대장군과 상장군이 있었는데, 의복과 춘장이 각각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장창당(長槍幢) 부대만 본진과 떨어진 위치에 진영을 설치하였는데, 마침 당군 3천여 명과 접전이 벌어져 압승하는 전공을 보였다. 장창당에서 붙잡은 당군 포로들을 대장군 진영에 보내오자, 다른 부대들도 이를 보고는 공명심에 불이 붙고 말았다. “장창당이 단독으로 진을 치고 공을 세웠으니 반드시 후한 상이 있을 것이다. 우리도 모두 같이 모여 있으면 고생만 할 뿐 바람직하지 않겠다.”며 결국 경쟁적으로 각자 군사를 떼어내어 별도로 진영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는 당시 신라군이 통일된 지휘체계로 구성되어 있지 못했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데, 이는 당장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였다. 신라군의 이상행동을 지켜보던 당군이 이들의 진영배치의 허점을 간파하고는 말갈과 함께 아직 진영이 다 꾸려지지 못한 틈을 타서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당연히 신라군은 오합지졸처럼 대패하였고, 심지어 장군급 지휘자들만 해도 이만큼이나 전사하고 말았다.
장군 대아찬(5등급) 효천(曉川), 사찬(8등급) 의문(義文), 산세(山世), 아찬(6등급) 능신(能申), 두선(豆善), 일길찬(7등급) 양신(良臣) 등
당시 김유신의 둘째 아들인 김원술(金元述)도 비장(裨將)으로서 참전하고 있었는데, 신라군이 당군의 전략적 승부수에 당해 대패하자 전장에서 따라죽을 작정을 하였다. 이때 그의 보좌관인 담릉(淡凌)이 곁에서 그에게 살아남아서 나중에 공을 세워 오늘의 실패를 만회하라며 끝까지 만류하는 바람에 겨우 살 수가 있었다.
그렇게 김원술이 상장군(上將軍)을 따라 무이령(蕪荑嶺)을 벗어나자 당군이 그들을 추격해왔다. 이들마저 금새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자, 거열주(居烈州)의 대감(大監)인 일길찬(7등급) 아진함(阿珍含, 603~672, 혹은 안나함(安那含))이 나서서는 상장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공들은 힘을 다해 빨리 가십시오. 나는 나이가 이미 70이니 얼마나 더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 바로 내가 죽을 날입니다.
그러고는 곧 창을 비껴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죽었고, 그의 아들 또한 아버지를 따라가서 전사하였다. 이들 덕분에 신라의 패잔군은 생존할 수 있었다.
석문 전투에서 패퇴한 대장군(大將軍) 등 일행은 당군을 피해 잠행하며 겨우 왕경(王京)에 돌아왔다. 패전 소식에 당황한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대책을 물었고, 그는 기세등등한 당군의 공세에 대비하여 우리는 각처의 요충지를 철저히 수비하는 전략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참고로 이것이 삼한통일의 영웅 김유신의 마지막 진언이 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바로 다음해에 7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때 동시에 김유신은 전장에서 달아난 자신의 아들 김원술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문무왕의 배려로 그는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돌아왔다는 사실에 스스로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김원술은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어쨌든 신라는 김유신의 제언대로 당나라와의 장기전에 대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 일순위는 무엇보다도 방어진의 완비였다. 순차적으로 이 당시 신라가 축성을 하였던 것들만 모아보아도 이 정도가 된다.
- (672년 8월)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 둘레 4,360보)을 쌓았다.
- (673년 2월) 서형산성(西兄山城)을 늘려 쌓았다.
- (8월) 사열산성(沙熱山城)을 늘려 쌓았다.
- (9월) 국원성(國原城),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 달함군(達含郡)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
이상의 대략적인 축성 위치들을 살펴보면, 우선 경주 북쪽에 북형산성, 남쪽에 남산성, 동쪽에 명활성, 서쪽에 선도산성을 신축하거나 보강하여 수도 외곽의 방어망 완비한 것이 가장 눈에 띈다. 그외에도 주로 임진강 이남의 방어선을 강화하고 또 경상도 내륙 지방의 주요 요충지에 대한 방어선을 완료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석문 전투에서의 결정적 패전은 신라측에 심리적 타격을 안겨준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신라 정부는 즉시 당나라에 대해 저자세 모드로 전환하였다. 전투 직후인 9월에 급찬(9등급) 원천(原川)과 나마(11등급) 변산(邊山)을 사신으로 하여 대신 사죄의 말을 전하도록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금, 은 등의 온갖 선물과 함께 국서를 지참하여 가서는, 작금의 사태를 마치 웅진도독부의 백제인들 때문인 것처럼 그 탓을 돌렸다. 아울러 전년도에 당군 보급선을 공격하여 생포하였던 포로 등을 석방하여 돌려보내주었다.
낭장 겸이대후, 내주(萊州) 사마 왕예(王藝), 본열주(本烈州) 장사(長史) 왕익(王益), 웅진도독부 사마 예군, 증산(曾山) 사마 법총(法聰), 병사 170명
이 구성을 보면 겸이대후와 왕예, 왕익은 당나라 출신이었고, 또 병사 170명도 작년의 해전 당시 생포한 이가 1백여 명이었다고 하였으니 다수는 그때의 포로들일 것이다. 예군은 앞서 나당전쟁 초기에 웅진도독부에서 신라의 내실을 염탐하기 위해 왔던 것을 포로로 붙잡아둔 상태였다. 법총도 667년에 웅진도독부 소속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바 있는 인물이었다.
당시 웅진도독부의 상층부 관직은 차례대로 도독-장사-사마의 구조였는데, 넘버3에 해당하는 예군조차도 신라에 붙잡혀 있었을 정도로 웅진도독부는 유명무실해져 있던 상황이었다. 여담이지만 이때의 포로 생환으로 당나라에 들어간 예군은 두 달 후인 11월 21일에 우위위(右威衛) 장군으로 임명되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로부터 6년 후에 66세의 나이로 당나라 장안에서 눈을 감았다. 조국 백제를 저버리고 당나라에 투항한 이의 의외로 편안한 죽음이었다.
그 사이 당군은 대신라 공세를 계속 거세게 이어갔다. 같은 해(672년) 12월에 고간의 군대가 고구려 부흥군과 백수산(白水山, 혹은 천산(泉山))에서 맞붙었는데, 결과는 고구려측의 패배였다. 당시 고구려 부흥군과 동맹을 맺고 있던 신라에서 지원병력을 파병해주었으나 이들 역시 고간에게 패해 2천 명이나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673년 여름 윤5월에는 연산도행군총관 대장군 이근행이 호로하(瓠濾河)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하고 수천 명을 생포하였다. 겨우 도망치는 데 성공한 나머지 세력은 모두 신라로 귀순하였다.

이러한 거듭된 전황의 열세로 인해 내부에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이 생겨났다. 673년 가을 7월에 아찬(6등급) 대토(大吐)가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측에 붙으려고 하다가 모의가 사전에 발각된 일도 있었다. 그는 즉각 처형당하였고 그의 가족도 연좌되어 천민으로 강등되었다.
그렇다고 신라가 계속해서 밀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신라도 슬슬 반격에 나설 채비를 마쳤다. 반란사건 두 달 후인 9월에 문무왕은 대아찬(5등급) 철천(徹川) 등에게 전함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이는 육상전에서는 밀리고 있어도 여전히 해상에서의 제해권은 신라가 확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같은 달 당군이 말갈과 거란의 연합군과 함께 신라의 북쪽 국경선, 즉 이 당시 임진강 일대를 침범해왔는데, 무려 아홉 번이나 치열하게 격전을 벌인 끝에 적군 2천여 명을 전사시키는 전공과 함께 신라군이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당군측에서는 호로강과 왕봉강(王逢江) 두 곳에서 익사한 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호로강은 대개 임진강으로 비정되는데, 왕봉강은 정확치는 않으나 그 부근이라면 한강의 수계 어딘가를 가리키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당군이 그렇게 쉽게 물러날 리는 만무했다. 이들은 곧 겨울로 접어들자 고구려 부흥세력이 차지하고 있던 우잠성(牛岑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낸 것은 물론, 거란과 말갈 부대는 별도로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로 고구려 유민들의 영토에서 벌어진 국지전이긴 했어도 여전히 강대국의 당군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태종 무열왕은 국경수비대(戍兵) 제도를 없앤 바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문무왕은 그 제도를 부활시켰다. 자세한 운영방식은 미상이긴 하나 당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민병대가 되었든 예비군이 되었든 누구의 손이라도 빌리지 않을 수 없던 상황임은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어쨌거나 당나라 입장에서도 쉽게 생각했던 신라가 의외로 잘 버티고 있자 슬슬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몇 년 사이에 고구려 유민 세력과 손을 잡고 공동으로 저항에 나서고 있는 것은 물론, 웅진도독부에 맡기려 하였던 백제의 옛 땅도 점차 신라가 차지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674년 봄 1월, 당 고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겠다고 하였다. 국제 외교에 있어 문무왕 정권의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행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는 신라 국내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당시 당나라 수도에 와 있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 곧 신라의 국왕이라고 공식 선언해버린 것이었다. 당사자인 김인문 역시 깜짝 놀라 당 고종에게 간곡히 취소해줄 것을 요청해보았으나 황제는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김인문은 당나라를 출발해 신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2월에는 백제와 고구려 멸망전에 모두 참전하여 한반도 전문가로 자리매김한 유인궤(劉仁軌, 602~685)를 계림도대총관(雞林道大摠管)으로 임명하고, 또 위위경(衛尉卿, 종3품) 이필(李弼)과 대장군 이근행을 부총관으로 그를 보좌하도록 하여 신라 정벌을 명하였다.
거꾸로 신라로서는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당군의 침공 소식을 접한 신라는 전군을 동원하여 대비태세에 들어갔다. 이해의 문무왕의 행적은 다음과 같았다.
- (674년 8월) 서형산(西兄山) 아래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하였다.
- (9월) 영묘사(靈廟寺) 앞길에 가서 군사를 사열하고, 아찬(6등급) 설수진(薛秀眞)의 육진병법을 보았다.
- (같은 달) 안승(安勝)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봉하였다.
군대 사열은 대내외적으로 군사력을 선보이는 이벤트이자 국왕을 중심으로 전의를 다지는 중요 행사였다. 또한 고구려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을 신라의 속국인 보덕국의 국왕으로 공식 인정한 것은 아마도 안승으로 상징되는 고구려 유민들의 힘까지 빌려 대당 항전에 들어간 것으로 풀이된다.
당군이 한반도 내에서 실제로 작전에 돌입한 것은 675년 초부터였다. 우선 봄 2월 유인궤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신라군을 공격해왔고, 또 연속으로 말갈군에게는 바다를 건너가 남쪽 지역을 공략하게 하였다. 여기서 칠중성 전투는 여러 기록에서 당군이 초반에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신라측의 한 기록에서는 소수(小守, 현령) 유동(儒冬)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방어에 성공하였다는 사실도 남아 있어서 그 신뢰성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동일한 전투가 아니라 이후에 한 차례 더 벌어진 것이라면 최소한 신라군이 연중에 칠중성을 재탈환하였던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어쨌든 그나마 다행히도 곧 유인궤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돌아갔고, 남아 있던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임명받아 마저 전쟁을 이어나갔다.
당군의 공세는 거셌다. 이들은 전방위적으로 전선을 넓혀 각지에서 신라군을 압박해왔다.
- 이해 봄에 말갈군이 신라의 북방 국경인 아달성(阿達城) 안으로 쳐들어왔다. 당시 태수(太守)인 급찬(9등급) 한선(漢宣)이 아달성 주민들에게 성 밖의 밭일을 시킨 사이에, 말갈군이 그 첩보에 따라 기회를 틈타 기습적으로 비어 있는 성 안에 진입한 것이었다. 아달성 성주 소나(素那)가 온몸을 바쳐 하루종일 용감하게 맞서 싸웠지만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 말갈군이 적목성(赤木城)을 포위공격하여 결국 함락시켰다. 현령(縣令) 탈기(脫起)가 주민들을 동원하여 애써 방어하였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모두 전사하였다.
- 당군이 석현성(石峴城)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온힘을 다해 저항하였지만 결국 전사하였다.
하지만 신라가 계속해서 전선에서 밀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체 기록이기 때문에 약간은 걸러 들어야 할 수도 있겠으나, 여하튼 이외에는 신라군이 당군과 크고 작은 전투에서 총 18번을 이겼고, 도합 6,047명을 전사시키고 전투마 200필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신라는 점진적으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해 가을 9월에는 설인귀가 당나라에 유학중이던 신라인 김풍훈(金風訓)을 길 안내자로 삼아 천성(泉城, 혹은 백수성(白水城))을 공격해왔다. 그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가 신라에서 처형당했었기에 그의 복수심을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신라의 장군 문훈(文訓) 등이 맞서 싸웠는데, 그 결과 당군 1,400명을 전사시킨 것은 물론 그들의 전함 40척까지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패전한 설인귀는 포위를 풀고 달아나야만 했고, 신라군은 추가로 전투마 1천 필까지 획득하였다.
이제 전황은 점차 신라에게 유리해지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신라의 최종 목표는 당군을 총괄하고 있던 이근행의 본진이었다. 이 당시 이근행이 주둔한 장소는 매소성(買肖城)이었고 그의 휘하에는 무려 20만의 대군이 배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앞서 3만 가량의 직속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너무 규모가 크고, 심지어 물리적으로 한 개의 성에 20만 명이 한꺼번에 주둔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쉽사리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당군의 총규모를 계산해보았을 때, 그가 대총관 유인궤의 후임 역할을 하였던 것 그리고 동시간대에 설인귀, 고간 등도 활약하고 있었던 사실 등을 감안하자면 이 당시 한반도에는 최대 10만 명 가량의 당군이 투입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를 부풀려서 20만으로 홍보를 하였던 것을 그대로 받아적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여하튼 9월 말 신라군은 이러한 당나라의 대군을 상대로 매소성 공방전을 벌였다. 그런데 이 전투의 기록은 당나라와 신라 양측이 다르게 남아 있다. 당군은 세 번에 걸쳐 모두 격퇴시켰다고 하였고, 신라군은 적군을 물리치고 전투마 30,380필과 그만큼의 무기를 획득하였다고 적고 있다. 어느 쪽이 맞을까? 어느 정도는 두 기록 모두 사실을 담고 있겠지만, 결론적으로는 신라측의 기록이 보다 정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보의 구체성과 이후의 동향으로 보건대 그럴 가능성이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전후 노획물의 수치도 매우 구체적이고 또한 전투가 벌어진 날짜도 9월 29일로 특정하고 있는 데다가, 특히 이 전투에서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이 재등장하는데 그는 지난번 패전에서 살아돌아왔다는 수치심을 이번 전투에서 몸바쳐 싸운 것으로 만회를 하였다고 한다.
가장 결정적 승리를 거둔 문무왕은 이제 슬슬 전쟁을 마무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해 많은 선물과 함께 당 고종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당나라 입장에서도 더 이상 승산도 보이지 않는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명분이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당장은 서로의 니즈가 맞아떨어진 모양새였다. 결국 이렇게 양국의 소모적인 대결은 한동안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덕분에 억지로 신라로 떠나야 했던 김인문 역시 다행히 다시 당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참고로 김인문은 공식적으로 당나라를 방문한 것만 일곱 번에, 당 조정에서 숙위(宿衛)한 기간만 해도 모두 합치면 22년이나 될 정도로 외교 전문가가 된 인물이었다. 그는 김춘추의 둘째 아들로, 어려서 학문에 밝았고 심지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도 많이 읽어 식견이 넓기로 유명하였다. 더욱이 글씨도 잘 썼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활쏘기와 말타기도 잘 했을 만큼 다재다능한 인재이기도 했다. 이만큼 능력 있는 인물이 야심 대신 애국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런 혼란의 시절에도 그는 결코 신라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점은 신라로서는 다행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완전히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아직 당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신라는 웅진도독부의 영토, 곧 대다수의 옛 백제 땅을 확보하였고, 나아가 이전 고구려의 남부 영토 일부까지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보다 좀 더 나중인 685년의 일이긴 하나 이를 발판으로 신라는 전국을 9주(州)로 재편할 수 있게 된다. 소위 주-군-현 체제의 확립인데, 주에는 도독(都督)을, 그 아래에는 10~20개의 군을 두고 태수(太守)를, 그리고 제일 아래의 현(縣)에는 소수(小守)를 두는 방식이 이 무렵 완성되었다.
이러한 신라의 움직임에 여전히 불만을 가지고 있던 당나라는 마지막 발악을 하였다. 사실상의 휴전을 먼저 깬 것은 당군이었다. 676년 가을 7월, 당군은 도림성(道臨城)을 공략하였고, 현령(縣令) 거시지(居尸知)가 전사하였다. 하지만 이는 국지전에 불과했다. 7년간 이어진 나당전쟁의 하이라이트는 바다에서 이루어졌다. 이해 겨울 11월, 사찬(8등급) 시득(施得)이 함대를 이끌고 설인귀와 소부리주(所夫里州)의 기벌포(伎伐浦)에서 해상전투를 벌였다. 처음에는 신라군이 연패하였으나, 심기일전하여 다시 진격하여서는 크고 작게 총 22번을 싸워 이겼고 4천여 명을 전사시키는 전공을 거두었다.
이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당나라의 신라 침공 의지는 완전히 꺾이고 만다. 전술적으로는 각지에서 그간 일진일퇴가 거듭되었지만 결론은 오랫동안 실력을 갈고닦아온 신라의 전략적 승리였다. 역대 최강의 당나라군을 상대로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승리를 거둔 것은 말 그대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연달아 멸망시킨 세계 최강대국이었다. 신라는 그에 비해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베트남이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에 의지해 정치적 성공을 이룬 것이었다면, 신라는 상대방과 동일한 조건으로 전장에서 정규전을 통해 승리를 거둔 것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 백제 멸망 시 당나라에 항복하였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은 그 당나라에 의해 웅진도독(熊津都督) 및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임명받아 원래는 한반도의 옛 백제 땅으로 돌아와 백제 유민들을 위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라가 결국 백제 영토를 모두 차지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는 끝내 고국의 땅은 밟아보지도 못한 채 타향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당서, 구당서, 일본서기, 문무왕릉비, 김인문 묘비, 부여융 묘지명, 예군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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