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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국 부여, 그 길고도 짧은 역사

위클리 히스토리 2026. 3. 16. 15:58

부여라는 나라를 알고 있는가? 들어는 보았겠지만 실제로 잘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와 달리 부여의 역사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에도 부여는 등장하긴 하지만 그저 고구려의 조연 정도 역할에 그친다. 한 마디로 무플에 가까운 존재감이다.

 

그럼 부여의 시작은 언제일까?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古記)>에는 그것을 기원전 59년 4월 8일로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년 4월 8일, 천제(天帝)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으로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초기 부여와 각국의 상황 - 국토지리정보원

 

하지만 이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부여는 기원전 사람인 사마천의 <사기>에도 언급이 나오고 있기에 당연히 그보다 더 이른 시기, 아마도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는 존재해왔다고 봄이 옳기 때문이다. 위의 이야기도 사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태어나기 1년 전으로 의도적으로 맞춰져 있는 듯 보인다. 이때 해모수가 유화(柳花)와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 직후에 잉태하여 주몽이 태어난다는 게 고구려의 건국 신화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실제 부여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옛날 북방의 탁리국(橐/索/槀離國) 왕이 자리를 비웠을 때 후궁에 있던 시녀 한 명이 임신을 하였다. 궁에 돌아와 그 사실을 알게 된 왕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이렇게 항변하였다.
“일전에 하늘에서 달걀만한 기운이 저에게로 떨어지더니 곧 임신이 된 것입니다.”
왕은 차마 그녀를 죽이진 못하고 가둬두었고, 나중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했는데, 돼지가 따뜻하게 돌봐준 덕분에 죽지 않았다. 이번에는 마굿간으로 보냈지만 말도 똑같이 아이를 보호해주었다. 이에 왕은 그 아이를 신기하게 여기게 되었고, 마침내 그 어머니가 키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아이의 이름은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이 커서 활을 잘 쏘자, 왕은 그의 자질에 두려움을 갖고 죽이려고 하였다. 결국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났고, 가까스로 엄호수(奄淲水)를 건너가 부여 지역(夫餘之地)에 도착하여 왕이 되었다.

 

이 기록 자체는 1세기경 중국 후한시대의 책인 논형(論衡)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를 기반으로 고구려도 자체적인 건국신화를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다들 잘 알고 있는 바로 명사수 주몽의 이야기이다. <삼국사기>에서도 그래서 주몽의 시호를 부여의 동명에서 따와서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부르고 있다.

 

부여의 건국은 정확치는 않으나 기원전은 확실하고, 이 신화가 중국에까지 알려진 것을 보면 나름 부여 안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 이후의 부여 역사가 그리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대다수의 정보는 고구려와의 관계, 그리고 일부는 중국 내 몇몇 나라와의 갈등 속에서 나타난다. 심지어 그 초창기 정보는 신화와 역사의 경계선상에 있는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기에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우선 해모수가 북부여의 중시조처럼 등장한 것은 앞서 언급하였고, 초기 부여의 역사에서는 그의 아들이 해부루(解扶婁)이고, 그의 후계자가 금와(金蛙)이며, 나중에 태자 대소(帶素)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에 아래에서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여기서는 우선 부여가 단일한 대국이 아니었던 정황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아직 금와의 재위 때인 기원전 37년에 북부여의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던 주몽이 주변의 질시를 피해 옮겨간 곳은 비류수(沸流水) 가였는데, 그곳은 일명 졸본부여(卒本扶餘)라는 곳이었다. 이로써 보면 동명이 처음 자리한 곳도 부여 지역(夫餘之地)이라고 했고 주몽이 머문 곳도 졸본부여라고 했으니, 혹 부여라는 말 자체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고대어에서 ‘나라’ 혹은 ‘지대’를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또한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古記)≫에 따르면 동명(여기서는 주몽)이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다”는 말은 곧 지역을 뜻하는 ‘주(州)’=’부여’로서 해석된다. 참고로 오해가 없도록 미리 말하자면 졸본주가 먼저가 아니라 원래부터 졸본부여가 있었다는 사실만 유의하면 되겠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라고 적시하면서, 추가로 인용된 <고전기(古典記)>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 온조가 기원전 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건국을 하였다고 한다. 즉 소위 고구려 건국 후에도, 최소한 이때까지도 고구려는 졸본부여라는 원래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을 확률이 있다. 혹여나 고구려라는 이름은 후대에 소급하여 이름지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 부분이다.

 

이 졸본부여 지역에는 송양(松讓)이 다스리는 비류국(沸流國)이 별도로 있었던 것을 보면, 혹 초기 부여는 여러 집단들의 연합체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실제로 초기 부여의 모습을 담고 있는 중국측 기록들에 따르면, 부여에는 군왕(君王)이 있고 또 6개 호족집단, 즉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豬加)·구가(狗加) 등과 같은 가(加)라는 세력집단이 존재했다. 이들 집단마다 상류층에 해당하는 호민(豪民)과 함께 하층민 계급인 하호(下戶)가 공존하는 구조였다. 여러 가(加)는 별도로 사출도(四出道)를 관장하였고, 큰 집단은 수천 가(家)이며 작은 집단은 수백 가(家)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든 마을(邑落)은 전부 각 가(加)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하니, 부여의 국왕은 전제군주라기보다는 일종의 귀족 대표자와 같은 위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문화에서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흉년이 들게 되면 그 책임을 국왕에게 돌렸다고 하는데, 만약 국왕이 직접적 통치자라기보다는 국가의 상징적 대표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듯하다. 그래도 궁실(宮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권력은 어느 정도 분점 구조였을지 몰라도 국왕으로서의 독자적인 권위는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부여의 국왕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절대군주는 결코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조금만 더 졸본부여를 들여다보자. 비류수 가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비류국(沸流國)이라고도 불리는 졸본부여는 부여의 원시조인 동명과 함께 우태(優台) 혹은 구태(仇台)를 중시조로서 중요하게 여겼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백제의 건국기를 보면, 백제의 시조인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는 우태라고 하여 곧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삼국사기>에 인용된 해동고기(海東古記)에는 백제의 시조를 동명이라고도 하고 우태라고도 한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중국측 기록인 <북사>나 <수서>에서는 구태(우태)가 동명의 후예로서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면서, 그의 후손들이 시조 구태(우태)의 사당을 도성에 만들어놓고 매년 네 번씩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참고로 대방고지, 즉 졸본부여의 시발점은 요동 지역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제3자의 정보도 추가로 확인해보자. <속일본기>에서는 백제의 시작을 도모왕, 즉 동명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도모’는 동명의 일본식 발음이다.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
백제의 태조(太祖) 도모대왕(都慕大王)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扶餘)에 머물러 나라를 열었다. 천제(天帝)가 녹(籙)을 주어 모든 한(韓)을 통솔하고 왕을 칭하게 하였다.

 

이로써 정리해보자면 백제는 부여의 동명을 시조로 여겼지만, 좀 더 가까운 우태(구태)를 중시조로 추가로 떠받들었음을 알 수가 있다.

 

참고로 구태와 우태는 정황상 동명이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우선 우(優)는 중국어로 여우(Yōu), 구(仇)는 중국어로 쳐우(Chóu)라고 거의 비슷하게 발음된다. 마치 고구려인 연(淵)개소문을 중국에서는 비슷한 뜻의 한자를 써서 천(泉)개소문이라고 하면서, 위앤(Yuān)을 취앤(Quán)이라고 바꾸어 사용한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문제는 우(優)는 뛰어나고 우수하다는 뜻인 반면에, 구(仇)는 적이나 원수라는 안좋은 뜻이다. 이로써 유추해보면 중국 입장에서는 졸본부여의 위대한 건국시조 우태보다는 한낱 오랑캐의 수장 구태라고 인식하였던 탓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 우태(구태)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는 후대에 부여의 국왕 중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역량이 뛰어났던 국왕을 ‘위구태(尉仇台)’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여/고구려 계통의 언어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라고 하였는데, 위구태는 곧 시조 구태(우태)를 닮은 위대한 국왕이라는 뜻이었다.

 

북부여와 동부여 - Wikipedia

 

다시 돌아와서, 부여는 동명에 의해 처음 건국되었고, 이후 기원전 1세기경에 신화와도 같은 해모수의 등장에 해부루로 상징되는 기존 집단이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제안으로 동쪽 해안가의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으로 분리되어 나갔다. 그래서 기존의 북부여와 구분지어 부르기를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북부여의 해모수 집단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바로 주몽 세력이었다. 이들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졸본부여(일명 비류국)와 힘을 합쳐 나중에 고구려로 거듭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은 왜 동쪽과 남쪽으로 흩어지게 된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기록 두 가지를 한번 살펴보자.

 

북부여에서 난(難)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難)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렀다. - <삼국사기> 지리지의 <고기(古記)>

 

둘 다 부여, 즉 북부여에서 있었던 난(難) 때문에 졸본 지역으로 피신해온 것을 보여주는데, 이 난이라는 것을 보통은 신화 속에서 주몽이 겪어야 했던 개인적인 곤란으로 읽는다. 그런데 한편으로 거의 동시에 벌어진 동부여의 세력 이탈도 이 난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듯하다. 앞뒤로 별다른 사건도 없이 재상 아란불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여 해부루가 동쪽으로 떠났다는 것이 신화의 내용인데, 아무래도 너무 뜬금없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신화마다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해부루가 먼저 떠나고 해모수가 그 빈 자리를 차지하였다는 버전도 있다. 혹 부여 자체의 시작은 동명의 신화대로 하나로서 출발은 하였지만, 좀 더 후대에 해모수로 상징되는 북부여 계열과 해부루로 상징되는 이탈 세력으로 부여 자체가 분화하는 모습을 신화가 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추측이 든다.

 

이러한 추론이 맞다면 원래의 본거지인 부여의 자리는 해모수의 북부여가 계승한 것이 되고, 난리를 피해 해부루의 세력이 동쪽으로 가섭원에서 동부여로 독립을 하게 되고, 또 그보다 규모는 더 작지만 주몽으로 상징되는 신흥세력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졸본부여를 계승하여 후에 고구려로 거듭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차피 신화를 기반으로 그 안에서 합리성을 추출해내야 하는 작업이기에 정답은 있을 수 없겠으나, 이후의 여러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다시 졸본부여에서 파생되어 나가는 백제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이 정도가 그나마 합리적인 추론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보면, 같은 부여 계통이라 하더라도 또 그 구성성분은 조금씩 다르거나 섞여 있는 경우들도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고구려의 초기 왕족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영향으로 마치 한 가문처럼 기록되어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최소한 두 가문의 연합체와 같은 형태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연표의 내용을 합쳐서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 1대 동명성왕 : 성은 고(高)씨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추모(鄒牟), 중(衆), 추몽(鄒蒙)이라고도 한다.
  • 2대 유리명왕 : 유리(類利) 혹은 유류(孺留) / 누리(累利)라고도 하며, 성은 해(解)씨이다.
  •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혹은 무휼(無恤) / 미류(味留)라고도 하며, 성은 해(解)씨이다.
  • 4대 민중왕(閔中王) : 해색주(解色朱) / 이름은 색주(色朱)고, 성은 해(解)씨이다.
  • 5대 모본왕(慕本王) : 해우(解憂) 혹은 해애루(解愛婁) / 이름은 애류(愛留), 우(憂)라고도 한다.
  • 6대 국조왕(國祖王) 또는 태조(대)왕(太祖(大)王) : 이름은 궁(宮), 어렸을 때의 이름은 어수(於漱)

 

보다시피 최소 2대부터 5대까지는 멀쩡히 기록상 주몽과는 다른 성씨인 해(解)를 사용하고 있다. 부여의 해모수 그리고 해부루와 같은 바로 그 ‘해’이다. 바로 아랫나라인 백제에서도, 예컨대 온조 때(23년) 우보로 임명된 70세가 넘은 해루(解婁)같은 인물은 원래 부여인이라고 못박아 나오고 있다. 후대인 472년에 개로왕(蓋鹵王)이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에서는 백제를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선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서는 백제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解)를 성씨로 삼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해’는 대표적으로 부여인의 증표같은 것이었다.

 

중국측 역사서에 전하는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대표적인 집단으로 5부(部)가 나오는데, 초기에는 소노부(消奴部)에서 왕위를 차지하였었으나 뒤로 가면서 계루부(桂婁部)로 왕위가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성씨만 놓고 보았을 때에는 바로 소노부가 곧 해씨를 사용한 부여계 집단이고, 계루부가 집권한 것은 아마도 태조대왕이나 국조왕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새롭게 고구려라는 국가를 중건한 6대 국왕 궁(宮)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소노부가 부여계임을 더욱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바로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고국천왕 원년의 기사이다.

 

소노(消奴)와 함께 각기 하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나아가 투항하고, 비류수 가로 돌아와 머물렀다.

 

부여식 집단명인 가(加)가 사용된 것도 흥미롭지만, 이들이 휘하에 거느린 것도 하호라는 부여식 하층계급이다. 심지어 이들의 지역인 비류수는 본래 비류국 곧 졸본부여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소노부를 고구려에서는 비류나부(沸流那部)라고 불렀다. 이처럼 고구려의 건국세력은 부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미 앞서 설명하였듯이 부여는 동부여와 북부여로 분화되어 각자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이는 대표적으로 동부여의 금와(金蛙)와 북부여의 대소(帶素)로 각각 구분하여 볼 수 있다. 동부여에서 해부루의 뒤를 이은 금와 세력의 경우엔 그래도 동병상련 때문인지, 비슷하게 북부여로부터 이탈해나간 주몽 세력과 그다지 사이가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 이들은 주몽의 어머니를 모시는 태후 사당(太后廟)까지 세워주었고, 좀 더 나중 일이지만 고구려의 국왕이 직접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여담이지만 유화는 실제로 고구려 사회에서 한참 후까지 신으로 모셔졌다. 고구려에는 부여신(夫餘神)과 등고신(登高神, 혹은 고등신)이라는 두 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전자는 하백의 딸 유화였고 후자는 그 아들 주몽이라고 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마치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모습과 비슷해 보일 텐데, 유화를 다름 아닌 부여의 이름을 딴 신으로 모실 만큼 고구려와 부여의 관계는 말 그대로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반해 북부여쪽에 자리잡은 대소 세력은 고구려를 상대로 강압적인 분위기를 견지하였다.

 

동명성왕 14년(B.C. 24) 가을 8월, 왕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동부여에서 사망하니, 그 왕 금와(金蛙)가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마침내 사당을 세워주었다. 겨울 10월, 사신을 부여에 파견하여 선물과 함께 감사를 표했다.
유리명왕 14년(B.C. 6) 봄 정월, 부여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볼모를 교환할 것을 제안하였다. 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꺼려 태자 도절(都切)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오지 않으니 대소가 분노하였다. 겨울 11월, 대소가 5만의 병력으로 침공해왔는데, 폭설로 인해 병사들이 많이 동사하였으므로 결국 회군하였다.

 

주몽의 신화 내용에서도 금와는 주몽에게 딱히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그 아들인 대소가 그를 싫어하였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참고로 이 둘을 부자지간으로 상정한 것은 신화적 패턴으로 이해된다.) 어쨌거나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였기에 부여의 대소는 재차 고구려 정벌을 추진하진 못하였다. 이로부터 14년 후인 서기 9년 가을 8월에 그는 사신을 파견해 고구려측에 수평적 관계가 아닌 수직적 관계를 요구하였다. 물론 고구려가 아래, 부여가 위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다음해인 서기 10년에는 고구려에서는 “북부여(北扶餘)가 파멸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내부적으로 분명 북부여측의 대고구려 공세가 예상되던 시점에 자체적인 혹은 어느 정도는 의도적인 소문이 만들어진 것이리라. 여기서 다시 보아도 대소의 부여는 북부여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북부여는 서기 13년 겨울 11월에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를 막아낸 것이 유리왕의 아들 무휼이었다.

 

무휼은 병력이 적어 맞설 수 없을 것을 우려하여 계책을 세워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그들을 기다렸다. 부여군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아래에 이르자 복병이 나가 기습하였고,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이 병력을 풀어 그들을 섬멸하였다.

 

하지만 패한 것은 부여군이었을 뿐 부여의 본국은 건재했다. 이로부터 7년 후, 무휼이 즉위한 지 3년차인 서기 20년까지도 대소는 여전히 고구려 병탄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었다. 이에 무휼도 부여에 대한 북벌(北伐) 준비에 나섰다. 결행은 서기 22년 봄 2월에 이루어졌다.

 

무휼은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고구려군의 사기는 드높았지만, 그 진격로는 진창길이 많아 작전운용에 문제가 있었다. 대소도 전시동원령을 발동해 전군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부여군의 작전은 침공군이 자국영토 내에서 준비가 덜 된 틈을 타 역습을 가하는 것이었다. 부여군이 생각한 대로 고구려군의 진격로에는 진창길이 많았기에 고구려군은 진창에 빠져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무휼은 괴유(怪由)에게 공격을 명하였고, 부여군은 병력이 더 많았음에도 초반의 기세를 버티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그 결과 놀랍게도 대소가 전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부여인들은 국왕을 잃어 사기가 꺾였음에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병력의 우세를 적극 활용하여 고구려군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완전히 포위당한 무휼은 군량이 소진되고 병사들이 굶주리기 시작하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하지만 하늘은 아직 그를 버리지 않았다. 며칠간 안개가 짙게 드리우자 무휼은 이를 활용해 군영에 허수아비를 마치 병사들처럼 세워두고는 샛길로 몰래 빠져나오는 과감한 작전을 감행하였다. 다행히 이것이 통하여 부여군의 추격을 받지 않고 고구려군은 전장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놀라운 점은 부여의 국왕이 전사하였는데도 부여군이 흔들리지 않고 전쟁을 속행하는 모습인데, 여기서 두 가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부여에서의 국왕의 위상인데, 다른 기록에 따르면 부여에서는 흉년이 들거나 하면 국왕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고 할 정도로 전제군주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 곧 부여국왕의 실체였다. 물론 시대에 따른 권력의 등락은 있었겠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후대의 강력한 왕권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 정도는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부여군의 전투능력이다. 그 전의 학반령 전투에서의 패배만 보더라도 과장은 분명 들어가 있지만, 전장에서의 부여군은 매우 강력해서 오랫동안 타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는 기록이 어쨌든 남아 있다. 부여의 내부를 조금만 더 들여다보자면, 부여에서는 적군의 침공이 발생했을 때 여러 가(加)들이 호민들과 함께 직접 전투에 나서고 하호는 보급을 담당하는 이원화 구조를 취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와 같은 방식을 고대 스파르타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호민에 해당하는 스파르타 시민이 전쟁을 전문으로 하는 집단이었다면, 일종의 농노 계급인 헬로트(helot)는 부여의 하호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실제로 부여에서는 “활, 화살, 칼, 창을 무기로 사용하며,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를 자체적으로 보유하였다”고 한다. 다양한 무기를 갖추고 있고 상시 전쟁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원화 구조가 가능하였던 것은 부여가 동북아의 여러 국가들 중 “가장 넓고 평탄한 곳으로, 토질은 5곡이 자라기에는 적당”하다고 하였을 만큼 뛰어난 경제력이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의 안정적인 계층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전쟁을 전담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부여군은 안정적인 전투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구조도 영구적인 효과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부여의 국왕(대소)을 전사시키는 전공을 보였음에도 부여라는 국가는 그대로 존속하였기에, 결과적으로 무휼의 부여 북벌은 당장은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하지만 부여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북벌 2개월 후인 여름 4월에 대소의 동생이 소수의 친위세력을 이끌고 부여로부터 독립하였다. 국왕의 전사로 인해 부여가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직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갈사수(曷思水) 가의 압록곡(鴨渌谷)에서 해두(海頭)국의 국왕을 제거하고 그곳을 빼앗아 정착하였다. 소국이지만 갈사국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아마도 갈사국은 졸본부여의 사례처럼 당시에는 갈사부여라고 불리지 않았었을까 싶다.

 

갈사왕의 예상대로 같은 해 가을 7월에 전사한 국왕 대소의 사촌동생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여 1만여 명의 국민들을 이끌고 고구려로 투항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전투에서는 패전하였으나 전쟁에서는 결국 승리한 셈이 되었다. 무휼은 항복해온 부여인들을 연나부(掾那部)에 배속시킴으로써 통크게 고구려의 주요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부여의 주류세력이 신흥 고구려국에 참여하는 것으로 고구려의 역사는 다시 한번 근본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고구려에서 5부(部) 중 연나부는 북부(北部)에 해당하는데, 당시 북부여가 검은색으로 상징되었듯 이칭으로 흑부(黑部)로 불리기도 하였다. 다시 한번 이때의 부여는 북부여임을 확인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이때의 사실을 중국측 역사서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정확히는 “막래(莫來)가 왕이 되어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는 크게 패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통합·복속되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마도 막래는 대무신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참고로 ‘막래(莫來)’는 중국어에서는 ‘모라이(Mòlái)’라고 발음되기에, 고구려인의 무휼 혹은 미류(味留)라는 발음을 듣고서 들리는 대로 적었던 것은 아니었겠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데, 갈사국이든 항복해온 부여인들이든 그들이 부여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후자의 1만여 명은 전체 부여의 인구가 8만 가구(戶)에 달했던 것에 비하면 일부분에 불과했다. 즉 여전히 부여에는 다수의 주민들과 그리고 지배층이 잔존하고 있었다. 이는 다음의 사실만 봐도 쉽게 알 수가 있다. 서기 49년에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어느 부여왕이 한나라로 사신을 보내었고, 혼란스러웠던 한나라의 부활을 이뤄 후한의 중흥시조가 된 광무제가 부여측에 후하게 보답하니, 이후 사절이 해마다 왕래하였다고 하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제6대 태조대왕의 집권기인 서기 68년 가을 8월에 갈사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마침내 고구려에 항복해왔다. 이로써 부여의 소국 하나가 또 역사에서 사라졌고, 고구려는 또 그만큼의 힘을 더하게 되었다. 그런데 갈사국이야 세력이 약했으니 그렇구나 할 수 있는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여측의 대고구려 외교는 조금 의아하다. 태조대왕 재위 25년(77년) 겨울 10월에는 부여 사신이 와서 뿔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고, 태조가 상서로운 물건으로 여겨 대사면을 시행하였다. 또 재위 53년(105년) 봄 정월에 부여의 사신이 와서 기이한 호랑이를 선물로 바쳤다. 그리고 69년(121년) 겨울 10월에는 직접 태조가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의 사당에 제사 지내고, 또 전국적으로 빈민을 구제토록 하고는 다음달 귀국하였다.

 

그렇다면 이 부여는 과연 어디일까? 이는 동부여임이 틀림없다. 그 결정적 증거는 바로 고구려의 태후 사당(太后廟)이 동부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태조가 부여를 방문하였을 때 숙신(肅愼)도 그곳으로 사자를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숙신 즉 읍루(挹婁)는 당시 대략 동만주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태조의 지근거리 방문에 자신들도 기왕 나서지 않았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를 가장 잘 증명해주는 것은 바로 다음의 기사이다.

 

(121년 12월) 왕(태조)이 마한(馬韓)과 예맥(穢貊)의 기병 1만여 기를 거느리고 현도성(玄莬城)으로 나아가 포위하였다. 부여의 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대와 힘을 합쳐 대항하여 싸우게 하니 우리(고구려)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122년 2월) 왕(태조)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遼東)을 침입하였다. 부여의 왕이 병력을 보내 이를 구하고 (고구려군을) 쳐부수었다.

 

참고로 이 즈음 고구려와 한나라는 서로 일진일퇴를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를테면 고구려는 118년 6월에 예맥과 함께 현도군을 공격하였고, 121년 봄에는 한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현도태수, 요동태수 3인방이 연합하여 침략해와서는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던 예맥의 수장을 사살하고 물품을 탈취해갔으며, 이에 태조는 동생 수성(遂成)을 투입해 현도군와 요동군 두 곳의 성을 불태우고 보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름 4월에는 고구려는 선비족 8천 명까지 끌어들여 요동군의 요대현(遼隊縣)을 공략하여 요동태수 등 다수를 살상하였다. 이처럼 한나라를 상대로 전방위적인 공세를 퍼부은 태조는 눈을 뜨고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조숙하였고 자질도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 때문에 나중에 국조 내지 태조라는 고구려의 중흥시조의 호칭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상기의 인용문을 정리하자면, 고구려군이 마한과 예맥의 군사 1만 명을 동원하여 현도성과 요동성을 연달아 공격하였고, 이에 대응해 부여의 왕자 위구태(尉仇台)가 2만의 병력을 이끌고 한나라측을 구원해주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보면 바로 직전에 태후 사당을 다녀온 그 부여와는 완전히 다른 곳임을 쉽게 추정할 수가 있다. 이들의 존재는 아마도 서기 22년에 있었던 북부여에서의 일부 세력의 고구려 귀순 후에도 그 자리에는 북부여의 잔존세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실 이보다 좀 더 앞서서 한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그 존재감을 역사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111년에 부여왕은 보병과 기병 총 7~8천 명을 동원해 낙랑(樂浪) 지역을 공격하여 그곳의 관리와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다만 그 공세가 전면전까지는 아니었던 듯 다시 한나라와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였다. 그리고 120년에 왕위계승권자인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사신으로 한나라 궁궐에 보내왔기에, 당시 황제는 위구태에게 인수(印綬, 인장)와 금, 비단 등의 선물을 하사해주었다. 이때의 양국간 동맹 체결에 따라 고구려가 한나라의 현도와 요동을 공격해오자 부여가 전쟁에 자동개입을 하였던 것이다. 전쟁 직후인 122년에도 부여왕은 한나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아마도 전쟁에서의 자국의 활약상에 대한 모종의 대가를 기대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상과 같이 양국간의 관계가 매우 밀접한 수준까지 발전하자, 136년에는 부여의 왕이 아예 직접 한나라 수도를 방문하였다. 이때 황제는 부여왕을 국빈으로 의전을 해주면서 각종 공연을 관람시켜줄 정도로 파격 대우를 하였다.

 

시간은 또 흘러서, 161년에도 부여의 왕은 한나라로 사신을 보내왔다. 그런데 무언가 양국간에 삐그덕거리는 신호가 있었던 모양이다. 불과 6년 후인 167년에 부여의 왕 부태(夫台)가 2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공격해온 것이다. 마침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잘 방어하였기에 부여군은 1천여 명의 전사자를 놔두고 퇴각해야만 했다.

 

174년에 부여는 다시 한나라와 외교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정확한 날짜는 확인이 어려우나 대략 190년대에는 그간 현도군과 거래를 트고 있던 것을 채널을 바꾸어 요동군, 정확히는 신흥 공손도(公孫度) 세력과 직접 거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며 접근하였다. 참고로 이 당시의 중원은 황건적의 난 이후 후한이 몰락하고 소위 삼국지의 시대가 펼쳐지던 초기였다. 공손도 또한 아버지 공손연(公孫延)을 따라 현도군에 피신와 있다가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아들을 잃어버려 슬퍼하던 현도태수 공손역의 예쁨을 받고는 그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그곳에서 성장한 인물이었다. 동향 출신의 서영(徐榮)이 그 유명한 동탁(董卓)에게 공손도를 요동태수로 추천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고, 이후 손자 대까지 이어지는 소위 요동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나라 말기에 공손도가 동북방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위세를 떨치게 되자, 이 당시 부여의 왕이 되어 있던 위구태는 요동군과 직거래를 큰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때에 동북방에서 고구려와 선비 세력이 강성해지자 공손도 입장에서도 동맹이 필요했는데 마침 부여가 그 두 세력의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을 기회로 자기 일족의 딸을 위구태에게 보냄으로써 부여와 힘을 합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노령이었던 위구태가 얼마 후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왕이 되었다. 그에게는 적자가 없이 서자 마여(麻余)만 있었다. 또 다시 간위거가 죽자, 여러 가(加)들이 모여 마여를 옹립하여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때 우가(牛加)의 형의 아들도 이름이 마침 비슷하게 위거(位居)였는데, 그가 부여에서 최고위직인 대사(大使)가 되었다. 그는 재물을 아끼지 않고 베풀어 나누어주기를 좋아하였더니 온 국민이 따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 덕분에 그는 당시 부여에서 권력의 핵심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이 당시 부여는 거의 해마다 위나라의 수도로 사신을 보냈다고 할 정도로 중국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부여는 내부적으로 위기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부여의 속국으로 간주되던 읍루의 집단적인 반란이었다. 이후 말갈이 되고 또 여진이 되었다가 최종적으로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는 집단의 조상뻘 되는 읍루는 오랫동안 부여국에 세금을 내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처지였는데, 그 부담이 점차 심해지자 결국 참지 못하고 220년대 초반경에 들고 일어난 것이다. 부여는 이미 여러 차례 읍루를 힘으로 제압한 적이 있지만, 문제는 읍루 자체가 숫자는 비록 적었어도 대신 몇 가지의 강점 때문에 완전히 제압하기가 힘들었다는 점이었다.

 

대표적으로 그들의 거주지가 험한 산악지대여서 게릴라전이 가능하였기에 단번에 진압하기 어렵다는 점이 첫째요, 이들의 전사로서의 개별 전투력이 매우 뛰어나 물리적으로 완승을 거두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 둘째였다. 부여뿐만 아니라 다른 이웃나라들도 읍루가 마치 후대의 왜구처럼 우수한 전투력을 기반으로 해상으로 노략질을 하고 다니는데도 끝내 막지 못하여 큰 근심거리가 될 정도였다. 이때 읍루의 반란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기록은 없다. 다만 한참 후의 일이긴 하나 결국 부여의 최종 운명을 결정짓는 데에도 결국 읍루의 후예인 말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또 244년에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처음 고구려를 토벌하면서 별도로 현도태수 왕기(王頎)를 부여에 파견하였다. 아마도 파견 목적은 굴양의 보급이었던 듯한데, 왜냐하면 위거는 대가(大加)를 보내어 교외에서 왕기를 맞이하게 하고는 위나라측에 군량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기폭제가 된 것인지, 위거의 작은아버지인 우가(牛加)가 딴 마음을 품자, 위거는 우가의 부자지간 모두를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압류한 것은 물론 조사관을 파견하여 재산 장부를 만들어 정부로 보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부여의 대표적인 귀족집안, 심지어 자신이 원래 속해 있던 집단을 멸문지화하듯이 탄압해버림으로써 그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어떤 사유에서인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국왕 마여가 일찍 사망하고, 그의 여섯 살짜리 아들인 의려(依慮)를 세워 차기 국왕으로 즉위시켰다. 의려가 너무 어렸기에 아마도 당시 부여의 실권자였던 위거가 섭정을 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자세한 사항은 알 길이 없다. 여하튼 의려의 미래는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북만주의 금동가면, 간접적으로나마 북부여인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운명의 날은 285년에 찾아왔다. 부여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던 선비족이 점차 흥성하면서, 이들의 일파 중 하나인 모용부(慕容部)를 이끄는 모용외(慕容廆)가 이웃나라 부여를 습격해온 것이다. 선비족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부여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국왕 의려는 혼란 속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고, 그나마 그의 아들과 형제는 옥저(沃沮)로 달아남으로써 겨우 목숨만은 보전할 수 있었다. 여기서의 옥저는 여러 옥저 중 부여에 가까운 북옥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보다 전인 246년에 고구려의 동천왕(東川王)도 위나라 관구검의 공격을 받았을 때 옥저 지방으로 피신을 간 적이 있다. 그만큼 지형이 험하여 외적의 침공시 피신처로 적합한 지역이었던 것 같다.

 

이때 뜬금없긴 하지만 위나라를 이어받아 진나라를 세운 무제, 곧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司馬炎, 재위 265~290)이 등장한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부여에서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해오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기에, 예상치 못한 부여왕의 비극적인 소식에 진 무제도 동정심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그는 부여국의 재건을 도울 방안을 모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물론 그것은 표면적인 사유에 불과했고, 실질적으로는 잠재적국인 북방의 선비족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판단이 더 컸을 것이 뻔하다.

 

어쨌든 진나라는 황제의 명에 따라 부여 지원을 담당하는 자로 하감(何龕)을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에 새로 임명하였다. 이듬해인 286년에 부여의 망명정부가 그 하감에게 접촉해왔다. 아마도 의려의 뒤를 이어 동생으로 보이는 의라(依羅)가 임시로 국왕의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들의 희망사항은 단순했다. 현재 잔존세력을 이끌고 본토로 돌아가 부여국 재건을 하고자 하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역할이 곧 그것이었기에 그는 독우(督郵) 가침(賈沈)과 지원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물론 모용외 세력도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가침의 지원군을 요격해왔다. 허나 부여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가침군이 반격에 성공함으로써 부여의 복국은 계획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본토를 유린당했던 부여의 국력은 예전만 못했다. 이후에도 모용외측에서 부여인들을 생포하여 중국에 팔아버리는 일이 횡횡하자, 무제는 그렇게 진나라로 들어온 부여인 노예들을 풀어주어 다시 부여로 돌려보내주고 또 인신매매를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물론 감사한 일이지만 선비족의 배후에 진나라의 우방국 부여를 존치시켜둠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제일의 목적이었음은 당연했다.

 

한편 이웃한 부여를 쓰러트림으로써 일차 목표를 달성한 모용외는 그 다음으로 좀 더 아래의 고구려로 눈길을 돌려서 293년에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해왔다. 이들의 공격은 집요했는데, 다만 고구려측도 만만치 않아서 특히 미천왕(美川王) 때에는 적극적으로 역공을 펼쳐나가기도 하였다. 양국간의 전쟁은 320년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고구려가 선비족의 관심을 끌고 있는 동안 부여는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였다.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333년에 아버지의 대를 이어 즉위한 다음 내부반발을 가까스로 진압한 후 337년에 비로소 연나라(전연)를 건국하였다. 그 직후인 339년에 그는 아버지가 실패하였던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다. 깜짝 놀란 고구려가 세자를 파견하는 등 유화적으로 대응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모용황은 전쟁을 재개하였다. 그는 전격적으로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켰고, 아버지가 시도하였던 것처럼 고구려의 선대왕 묘를 파헤쳐 시신을 탈취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어머니마저 전연에 생포되자 자신의 동생을 볼모로 보내는 등 저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담이지만, 전연의 뒤를 이어 모용수(慕容垂)의 후연까지 들어선 다음에야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시기에 제대로 복수를 하게 된다.

 

고구려만 전연으로부터 치욕을 당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가 동생을 볼모로 보내고도 또 남소성(南蘇城)을 빼앗긴 바로 다음해(346년)에 모용황은 세자 모용준과 그 동생 모용각 형제에게 기병 1만7천 명을 내어주면서 부여 공격을 명하였다. 역사에서는 이 당시 부여가 원래 본거지였던 녹산(鹿山)에 있다가 백제(百濟)의 침략을 받아 세력이 쇠하면서 결국 서쪽으로 선비족의 연나라 가까이로 옮기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대륙에서 활약한 백제의 존재 때문에 단순히 고구려의 오기라는 보수적 의견부터, 이것이 곧 요서 백제의 근거라는 주장은 물론, 서쪽이라는 방향에 주목하여 당시 이들보다 동쪽에 있던 말갈 세력일 것이라는 추정까지 다양한 설들이 제기되어 있는 상태이다. 고유명사 하나 때문에 해석이 난무하게 된 역사의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여하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웃나라 고구려가 당하는 모습을 보며 부여 역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적극적으로 방비를 하고 있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부여는 연나라에 대한 방비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국력의 쇠퇴로 더 이상 정상적인 국방을 수행할 만큼의 역량이 없었던 탓이 컸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1만7천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전연군의 부여 공략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부여왕 현(玄)이 생포되었고 주민 5만 명도 함께 전연으로 끌려갔다. 모용황이 현에게 진동장군(鎭東將軍)이라는 작위를 내려주고 자신의 딸을 내어주면서 사위로 삼았을 만큼 그에 대한 대우는 나쁘지 않았지만, 어쨌든 정확히 61년 전에 의려가 자살하고 부여라는 나라가 한 차례 멸망하였던 그 상황이 또 다시 반복되고 만 것이다.

 

이때가 곧 오랜 세월을 이겨내며 북방의 강자 자리를 지켜왔던 북부여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시점이다.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만주원류고>에 인용된 <통전(通典)>의 기사와 고구려의 대사자(大使者) 모두루(牟頭婁)의 묘지에 나온다. 우선 통전은 이렇다.

 

고구려는 부여의 땅을 차지한 다음 그곳에 부여성을 세웠다. 뒤에 발해에 속하게 되었다.

 

추가적인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후에 발해도 부여성을 운영한 곳이 바로 북부여의 중심지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부여는 동부여가 아니라 북부여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고구려와 발해의 부여성은 엄연히 북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대사에서는 항상 있는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부여’를 입증해주는 유물이 발굴되지는 않은 상태이기에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북부여의 중심지를 대략 농안(农安), 창춘(长春), 지린(吉林) 등지로 보고 있다.

 

그리고 모두루의 경우 할아버지인 대형(大兄) 염모(冉牟)는 고구려 고국원왕 때 활약하였던 인물인데, 주몽이 북부여 출신이듯 염모와 모두루 집안도 북부여 출신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염모는 부여 멸망 당시 혹은 그 직후에 모용부의 선비족, 즉 전연과 북부여에서 대결을 펼쳐왔던 모양이다. 그의 손자인 모두루 역시 광개토대왕의 치세 때 북부여수사(北夫餘守事)라는 지방관 직책을 받았다. 이를 통해 보면 이들 집안이 북부여의 몰락과 더불어 그 지역을 확보하여 고구려의 영역화한 것이 아닌지 짐작해보게 된다.

 

다만 북부여가 역사에서 퇴장하였다고 하여 아직 부여 전체가 사라진 것은 또 아니었다. 아직 그 동쪽에는 동부여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전면에 나와 있던 북부여가 외적의 침입을 막아준 덕분에 좀 더 오래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국력의 저하는 피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북부여보다 이른 시기에 약소국으로 전락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광개토대왕의 치세 끝무렵인 410년에 고구려는 동부여를 침공하였다. 사유는 그들이 고구려의 오랜 속민(屬民)인데도 더 이상 조공이라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속민이라는 표현은 동일하게 백제와 신라에게도 사용하고 있기에, 실제로 식민지화되었다기보다는 강대국에게 사대하는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여하튼 고구려군이 동부여의 수도인 여성(餘城)까지 진격해 들어가자 이들도 깜짝 놀라서 백기투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광개토대왕도 이에 회군을 결정하였는데, 미구루(味仇婁), 비사마(卑斯麻), 타사루(椯社婁), 숙사사(肅斯舍) 등 총 다섯 압로(鴨盧)가 고구려에 귀순하였다고 한다. 압로의 뜻은 명확치 않지만 아마도 백제의 담로같은 지방행정구역을 지칭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광개토대왕의 생애 마지막 대외정복활동은 그 대상이 동부여였다. 그렇기에 그의 비문은 논리적 흐름상 자신의 조상인 주몽(추모)이 북부여에서 기원하였다는 내용으로 시작하여, 후손인 자신이 동부여를 정벌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453년에 사신 안동(安東)을 북위로 보내었고, 그에 대한 답방 사절로 북위는 이오(李敖)를 보내왔다. 그가 고구려의 평양성은 물론 전국 각지를 돌아다녀본 다음 본국에 보고한 내용이 짧지만 남아 있다.

 

요동에서 남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곳으로서, 동쪽으로는 책성(栅城), 남쪽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르고, 북쪽은 옛 부여(舊夫餘)에 이른다. (후략)

 

북부여는 역사에서 사라졌기에 슬프지만 이제는 ‘옛 부여’라는 이름으로 지역을 나타낼 때에나 사용될 따름이었다.

 

또 504년에는 장수왕의 손자 문자왕이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북위에 보냈는데, 흥미롭게도 그가 선물로 황금을 가져오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것도 남아 있다.

 

황금은 오직 부여에서 날 뿐인데,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났기에 (중략) 모두 우리나라로 옮겨와 살게 해주었습니다. 이번에 그 물건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사실 그런 도적들 때문입니다.

 

이보다 정확히 10년 전에 동부여 역시도 더 이상은 국가 운영이 힘들다고 판단하여 그 왕과 왕비, 왕자까지 모두가 고구려에 완전히 귀화하는 결정을 내렸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물길, 곧 고대 읍루의 뒤를 이은 말갈 세력의 강성으로 인해 같은 지역권에 있던 동부여가 완전히 포기를 선언하게 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동부여마저 스스로 국가의 문을 닫는 선택을 하였기에 494년 2월은 결국 부여가 역사에서 완전히 퇴장한 공식적인 날이 되었다.

 

이로써 부여는 정말로 사라진 것일까? 놀랍게도 역사는 의외의 순간에 의외의 장소에서 반복되기도 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또 다른 부여의 후손인 백제였다. 부여가 마지막으로 사라졌던 그날로부터 정확히 44년 후인 538년 봄에 저 멀리 남쪽의 백제가 수도를 사비(泗沘, 혹은 소부리(所夫里), 훗날의 충남 “부여”)로 옮기면서 스스로 남부여(南扶餘)라는 국명을 선포하였다. 스스로 부여에서 기원하였다고 밝혔던 백제가 역사에서 소멸되었던 그 부여를 스스로 되살린 것이다. 또한 백제 왕가는 옛 부여 계통의 해씨를 쓰는 대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씨 자체도 부여를 썼다. 그렇게 동북아의 오랜 고대국가 부여는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곳에서 또 다시 그 끈질긴 생명의 씨앗을 잉태하는 역사적 저력을 보여주었다.

 

 

# 참고자료 : 삼국유사, 삼국사기, 동명왕편(이규보), 후한서, 삼국지, 진서, 위서, 북사, 신당서, 자치통감, 한원, 만주원류고, 속일본기, 광개토왕릉비, 모두루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