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마한(馬韓), 고조선과 한반도를 잇다

위클리 히스토리 2026. 3. 23. 13:25

장면 #1. 

2009년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과정에서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졌다. 바로 전혀 도굴되지 않은 상태의 사리공 안에서 사리장엄구와 금제사리봉영기가 발굴된 것이다. 여러 놀라운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놀라웠던 것은 오랫동안 백제 무왕의 아내는 선화공주라고 믿어왔던 신화가 깨진 것이다. 그곳에는 무왕의 왕후가 좌평(1품) 사택적덕(沙乇積德)의 딸이라고 명확히 기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신화 속 선화공주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익산 미륵사기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 국가유산청

 

장면 #2.

<삼국유사> 무왕(武王) 조에는 서동(薯童)의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연(一然)이 여기에 주석을 달아놓은 것이 전해진다. 옛 판본에는 무왕이 아니라 무강(武康)왕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마디로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고 정확히 지적하였다. 서동의 설화에서는 선화공주를 얻는 주체가 곧 어린시절의 무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은 백제 무왕이 아니라 무강왕이 그 주체라는 것이니 이건 또 어찌 된 일일까?

 

 

우리가 그간 당연하다고 믿어온 것들은 사실 항상 당연한 것은 아니다. 역사에서는 특히 그러한 일들이 많은데, 예컨대 서동의 선화공주와의 로맨스가 그렇다. 일연도 <삼국유사>에서 서동의 설화를 다루면서 무강왕이 없으니 그렇다면 무왕이라고 생각하고 백제의 역사적 사실과 서동의 설화를 결합하여 마치 하나의 이야기인양 기록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아마도 무왕의 어린시절 이름인 일기사덕(一耆篩德) 즉 ‘사덕’이 서동과 발음이 우연히 비슷하다보니 더욱 그렇게 혼선을 빚었을 지도 모르겠다.

 

우선 당장 무왕의 어린시절 인물로 표현된 서동만 하더라도 어머니는 수도의 남쪽 연못 근처에 살던 과부였고 아버지는 연못의 용(龍)이라고 되어 있다. 신화를 역사적으로 해석해서 백제 국왕의 서자 등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여하튼 설화만 놓고 본다면 그는 백제 왕실 출신도 아니었다. 또한 그가 왕위에 오른 것도 설화에 따르면 그가 ‘인심을 얻어서’(得人心)였지 결코 왕족의 혈통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러 모로 수상한 설화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의외로 이보다 한참 후에 고려의 역사를 다룬 <고려사절요>에 실려 있다.

 

충숙왕 16년(1329년) 3월, 도적이 금마군(金馬郡)에 있는 마한(馬韓)의 선조 무강왕(武康王)의 무덤을 도굴하였으므로 체포하여 전법사(典法司)에 구금하였다.

 

여기서 금마군은 오늘날 전라북도 익산을 말하는데, 이곳에 뜬금없지만 무강왕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백제가 아니라 마한의 선조(祖)라고 떡하니 나와 있다. 이는 <고려사>에서도 추가로 확인이 가능하다.

 

금마군(金馬郡)은 본래 마한국(馬韓國)이다. 후(後)조선의 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해 바닷길로 남쪽으로 왔는데, 한(韓)의 땅에 이르러 개국하고 마한이라 불렀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병합한 후 금마저(金馬渚)라고 불렀다. (중략) 미륵산석성(彌勒山石城)이 있는데, 민간에서 전하기를 기준이 처음 쌓았다고 하여 기준성(箕準城)으로 부른다고 한다. 또 후조선 무강왕(武康王)과 그 왕비의 능(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 있다.

 

물론 <고려사>의 찬자 역시 헷갈렸는지 이 뒤에 백제 무왕이 서동이라는 설을 부기하고는 있다. 그럼에도 무강왕이 고조선 말기의 혼란한 시절에 실존하였던 왕임은 이로써 확실해졌다. 고조선 말미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해왔다가 기꺼이 자신을 받아준 준(準)왕을 배신하고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였다는 사실은 꽤 많이 알려져 있다. 그때 준왕은 긴급히 바다를 통해 탈출하였고 이후 정착한 곳이 바로 오늘날 익산 지역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온갖 정보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데, 여기에도 익산의 역사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자료가 기재되어 있다.

 

금마군(金馬郡)은 옛날 무강왕(武康王)이 왕을 칭한 땅이다. (중략) 무강왕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과 함께 … (후략)

 

<고려사>에서는 마한을 세운 이가 고조선의 마지막 준왕이라고 하였고 여기서는 무강왕이라고 하였는데, 둘이 동일인물인지 혹은 서로 다른 인물인데 기록이 섞여서 마치 하나로서 마한을 건국한 것처럼 남게 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신기한 것은 마한국 무강왕의 아내가 바로 선화부인(善花夫人)이었다고 명시하고 있기에, 앞서 무강왕과 왕비의 능이라는 것이 곧 그와 선화부인과의 능일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정컨대 무강왕의 아내 선화부인, 그리고 서동과 선화공주 이 두 설화가 어쩌다 같은 지역의 백제 무왕이라는 역사적 실체와 교묘하게 섞여들면서 마치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로 자가발전을 하였던 것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동심파괴(?)가 이 글의 목적은 아니기에 서동의 설화 이야기는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드는 부분은 하나 있다. 그렇다면 무강왕 혹은 준왕으로 대변되는 고조선의 마한 이주설은 역사적 사실일까 하는 점이다.

 

삼국시대 초입 그리고 그 이전의 역사를 파헤치는 것은 사실 눈 가리고 코끼리 다리 만지기와 같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정보도 지극히 부족하고 또 각 정보도 부정확한데다 툭하면 서로 불일치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유물이라도 많으면 좋겠지만 만주는 지금은 우리땅이 아니고 한반도는 오랜 그리고 잦은 전쟁의 영향과 심지어 비극적인 근현대를 겪으면서 없어지고 사라진 것들이 너무도 많다. 어쩔 수 없이 이웃나라의 파편화된 기록과 부족한 고려 등 후대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고 한번 최대한 자세히 살펴보자.

 


 

기원전 195년 이후 언젠가, 고조선의 마지막 국왕 준은 위만에게 배신을 당하고는 급히 궁인(宮人)들과 주위의 측근들, 그리고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바다로 탈출하였다. 그가 향한 곳은 남쪽 방향이었다. 당시 한반도에는 진국(辰國)을 위시한 수많은 중소 세력들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준은 그중에서 서쪽의 마한을 타깃으로 삼았다. 자신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평화롭던 마한은 고조선군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준은 마한을 무력으로 점령하였고 스스로 마한왕이 되었다. 그리고 목지국(目支國) 혹은 월지국(月支國)을 수도로 삼아 각지를 간접 통치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참고로 <삼국지> 등의 당시 기록에서는 원래 진국이 서해부터 동해까지 관장하고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그전까지는 그들이 패권세력이었던 것 같지만, 고조선의 남하로 힘의 중심추가 서쪽의 마한으로 옮겨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진국은 동쪽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진한 일대의 지역 맹주로서만 존속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만 고조선을 탈출한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108년 이전 언젠가에는 위만의 후손인 우거(右渠)에 반발한 또 다른 세력이 한반도로 남하해왔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라고 알려져 있는 그는 우거왕과 뜻이 맞지 않자 진국으로 망명을 떠났는데, 그때 그와 함께 한 고조선인만 해도 무려 2천여 호(戶)가 되었다고 한다. 먼저 마한으로 간 준과 규모 면에서 그리 뒤쳐지지 않을 정도의 세력이었다.

 

고조선과 마한 - 국토지리정보원, Wikipedia

 

이 진국은 언젠가 진한(辰韓)으로 분화되게 되는데, 처음에는 6개국이었고 또 다시 분열을 거쳐 12개국으로 더 나뉘어졌다. 그것을 나중에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곧 신라이다. 어쨌든 초창기 진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중국의 진(秦)나라(기원전 221~206년)에서 고된 노역을 피해 망명해왔고, 마한의 도움을 받아 그 동쪽 지역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마한은 그 시점상 고조선의 남진 전의 원래 마한이다.) 그래서 진한을 진한(秦韓)이라는 다른 한자로 적기도 하는데, 진나라 유민들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중간에 별명처럼 그렇게 불렸던 것 뿐인 듯하다. 여하튼 그 때문인지 <삼국지>에 따르면 마한과 진한은 서로 언어가 달랐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런데 이뿐만 아니라 나중에 최치원은 “진한은 본래 연나라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이라고도 했고, 또 진한에 한나라 출신의 1천5백 명이 살았던 흔적도 있고 하여, 사실상 진한은 다문화 사회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이웃한 변한(弁韓)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변한은 진국의 영향 탓인지 변진(弁辰)이라고도 하는데, 이들도 12개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진한보다 좀 더 아래에 있긴 하였지만 거의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다시피 하였기에 거주문화나 의복양식 등 비슷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남쪽으로 왜국과도 가까워서 문신을 하는 이들도 왕왕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12개국 중 독로국(瀆盧國)은 아예 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참고로 이 수많은 소국들은 마한의 54개국까지 포함하면 총 78개국에 달하는데, 그 규모도 제각각이어서 큰 곳은 1만여 가(家), 아주 작으면 6~7백 가로 구성된 곳도 있었다. 대략 마한이 10여 만 호(戶), 진한과 변한을 합치면 4~5만 호가 되었다고 한다. 가구당 인구는 명확치 않으나 당시 인근 낙랑의 평균이 6명 남짓 되었으니, 거칠게나마 추정해보자면 아마도 1백만 명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여기서 진·변한의 24개국 중 절반인 12개국은 예전의 지배세력이었던 진왕에게 여전히 형식상 예속되는 구조였는데, 이 진왕조차도 마한 사람이 세습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진왕은 마한에게 재종속되는 그런 다층구조였던 것이다. 이 또한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시간차를 두고 그렇게 변화한 것인데, 마한에서 고조선계 왕족의 대가 끊어지자 후에 마한인이 다시 진왕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더불어 <위략(魏略)>은 진한 사람들이 이주자였기 때문에 마한의 통제를 받는 것이라고 부연하고 있는데, 이민족인 중국계라서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조선상 역계경처럼 같은 고조선 출신의 이민자들이어서 그렇게 볼 여지가 더 클 것 같다. 이는 다음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 예전에 (고)조선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중략)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고)조선의 유민들이 나뉘어 70여 국으로 되었으니 지역은 모두가 사방 100리나 되었다. - <삼국유사> 한(韓) 72국

 

이처럼 고조선은 위만의 침탈 직후 한반도로 남진을 한 이래 삼한 지역 전체에 두루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마지막 왕 준과 무강왕은 동일인물일까 서로 다른 인물일까? 역사기록은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당시 정황에 좀 더 집중해서 본다면 별개의 인물일 가능성이 조금 더 높을 것 같다. 물론 마한을 세운 왕을 무강왕이라고 표현한 기록도 있다보니 조심스럽긴 하나, 서동 설화 자체가 정말로 무강왕을 묘사한 것이 맞다면 고조선의 남진 이후 언젠가의 일로 추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그렇다면 그 시점도 한번 대략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고조선의 준왕 세력이 남하하여 서쪽으로 마한을 차지한 시점이 기원전 195년 이후이고, 역계경으로 대변되는 또 다른 고조선 세력이 동쪽으로 진국에 합류한 것이 기원전 108년 이전이었다. 그리고 역사기록에서처럼 마한의 고조선 왕가가 끊기는 시점에 젊은 무강왕 곧 서동이 등장하였다고 가정해보자. 또 마찬가지로 고조선 출신들이 자리잡고 후대에 신라로 발전하게 되는 지역인 동쪽 진한에는 선화라는 이름의 공주가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서동요와 같은 작은 꾀를 써서 선화의 ‘마음’도 얻고, 또 동시대 국민들의 ‘인심도 얻은’(得人心) 무강왕이 결국 새로운 마한의 왕으로 즉위하였다고 가정을 해보면, 지금까지의 역사와 설화가 하나로 이어질 수가 있다. 많은 부분이 가정이긴 하나, 이처럼 고조선의 왕 준은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진국을 밀어내고 마한을 중심으로 목지국(혹은 월지국)에 망명정부를 세운 건국의 시조가 되고, 무강왕은 고조선의 대를 이어 새로운 혈통으로서 마한을 새롭게 세운 중흥시조로서 남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이 이후의 역사는 어느 정도는 구체적으로 또 어느 정도는 의문을 가지고 추적해나갈 수밖에 없다. 이는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가 등장하자마자 마치 진한과 변한을 모두 통합해버리고, 또 마한 역시 백제의 온조(溫祚)에 의해 서기 8년에 너무도 금새 몰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 실증주의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믿지 못하고 훨씬 후대의 일을 소급하여 적은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 고구려가 121년에 바로 그 마한 세력과 함께 현도와 요동을 협공하는 기록을 들면서 말이다. 나 역시 의구심이 있는 편이긴 한데, 그렇다고 임의로 기년 조정을 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우선 <삼국사기>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도록 하겠다.

 


 

박혁거세 38년(기원전 20년) 봄 2월에 호공(瓠公)을 사신으로 하여 마한을 방문하게 하였다. 호공은 흥미로운 인물인데 본래 왜인이었지만 바다 건너 이주해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이때 마한의 왕이 호공에게 따지듯이 었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이거늘 근자에 제대로 공물을 보내오지 않으니 이는 사대의 예의가 아니지 않소?”

 

과거 마한에서 이주민들을 동쪽으로 진한의 땅을 떼어주고 그곳에 살게 배려해주었는데, 어느새 국력이 급속히 성장하여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에 대한 반발심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공도 신라를 대변하여 마한을 찾았던 만큼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나라를 열고 일으킨 이래 인사도 흘륭하고 천시도 조화로우니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진한의 유민부터 변한과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경외의 마음을 갖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왕께서 겸허히 저로 하여금 교빙을 하게 하셨으니 이는 오히려 깍듯이 예의를 차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어찌 대왕께서는 불같이 화를 내시고 군사(兵)로 겁박까지 하시는 것입니까?”

 

그의 당찬 대답에 마한의 왕이 더 분노하며 사신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거듭 말리자 어쩔 수 없이 귀국은 허락해주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해(기원전 19년)에 마한 왕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전년도의 일을 기억하고 있던 신하 한 명이 박혁거세에게 이렇게 진언하였다.

 

“서한(西韓, 마한)의 왕이 지난번 우리 사신에게 모욕을 주었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그곳을 공격하면 분명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의 불행을 이용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오.”

 

그의 대답은 반박할 수 없는 정론이었다. 오히려 박혁거세는 사신을 마한으로 보내 조문하도록 하였다. 다만 여기서 마한을 그저 한낱 서쪽 나라라는 듯이 서한이라고 부르며 마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 것을 보면, 실제로 이제는 시대가 바뀌면서 마한도 점차 지배자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있었음을 이웃국가들도 조금씩 느끼고 있엇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 당시 신라가 진한에 속해 있었다면, 백제는 졸본부여(혹은 고구려)로부터 남하하여 마찬가지로 마한의 배려로 북부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자리잡을 수 있었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북방의 강자 부여의 문화권에서 출발하였기에 오래지 않아 마한 제국 중 대표주자로 떠오른 게 곧 백제였다. 물론 초기에는 백제도 지역의 강자였던 마한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긴 하지만 말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백제의 건국자 온조는 재위 10년(기원전 9년) 가을 9월에 사냥을 나갔다가 신비로운 사슴을 잡았다. 그는 그것을 마한에 선물로 보냈는데, 이는 곧 백제가 마한 내에서 아직은 하나의 소국에 불과했음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온조는 수도 이전을 검토 중이었는데, 13년(기원전 6년) 8월에 마한에 사신을 파견해 천도 사실을 통지하였다. 국가의 중심지를 옮기는 대역사였던 만큼 상국인 마한에 이를 보고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최종 수도를 옮기는 것은 다음해 1월이 되는데, 위치는 바로 한산(漢山) 아래 위례성(慰禮城)이었다. 이 당시 백제의 영토는 북쪽으로는 패하(浿河, 대동강 혹은 예성강 추정), 남쪽은 웅천(熊川, 금강), 서쪽으로는 큰 바다(황해), 동쪽으로는 주양(走壤, 강원도 춘천)까지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당시 마한의 상한선도 백제에 맞붙어 그 남쪽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여기에 백제가 그 북쪽으로 낙랑과 말갈 등과 접경하고 있었던 까닭에, 마한 입장에서는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주는 효과도 있었다. 기원전 1년 겨울 10월에 말갈이 백제를 기습해온 일이 있었는데, 온조가 군대를 이끌고 칠중하(七重河, 임진강)에서 맞서 싸웠다. 그 결과 말갈의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는 등 방어에 성공하였고, 나머지 적군은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버리는 것으로 보복하였다. 흥미롭게도 그 포획한 추장은 마한으로 보냈는데, 역시 상국 마한에게 자신들의 성과를 인정받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러한 백제의 적극적인 대외 방어정책은 한편으로는 이웃나라에게 의심 내지 오해를 살 여지도 있었다. 그러한 사례가 하필 남쪽의 마한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했다. 서기 6년 가을 7월에 온조가 남쪽 국경선에 일종의 방어선으로 웅천책(熊川柵)을 세웠는데, 이를 자신들에 대한 잠재적인 적대행위로 간주한 마한의 왕이 사신을 파견해 백제를 힐책해온 것이다.

 

“왕(온조)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해준 게 결코 박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당연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텐데, 오히려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스스로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벽과 해자를 크게 건설하여 우리 영토를 침범해오다니, 이게 무슨 일이오?”

 

온조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찔리는 게 있었던지 결국 목책을 헐어버리는 결정을 내렸다. 허나 이러한 마한측의 대응이 백제 입장에서는 결코 곱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 마음에 품고 있던 온조에게 바로 다음해(서기 7년) 봄 2월에 희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한성(漢城)의 민가에서 송아지 한 마리가 태어났는데 머리가 둘인 기형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별것도 아닌 단순히 하나의 신기한 사건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천문관이 나름대로 이를 “이웃나라를 병합할 징조”라고 해석하여 보고해준 덕분에 온조가 매우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때 드디어 진한 그리고 나아가 마한을 병탄할 마음을 가졌다. 거의 동시대의 신라도 느끼고 있었던 것을 그 역시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마한이 점차 쇠락해가고 있다는 징조 말이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주변에 알린 것은 서기 8년 가을 7월의 일이었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위와 아래가 서로 마음이 갈라져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이오. 만일 마한이 타국에 병합된다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이 될 테니 그땐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오. 차라리 우리가 먼저 움직여서 차지하는 편이 더 낫겠소.”

 

그리고는 불과 3개월 후인 겨울 10월에 비밀리에 기습군을 준비시켰다. 대외적으로는 사냥을 핑계 삼았지만 실제로는 마한을 공격하려는 목적이었다. 마한측이 공격을 예상치 못하였고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였던 까닭에 백제군은 생각보다 손쉽게 마한의 수도 일대(國邑)를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만 인근의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 두 성만은 쉽게 항복하지 않고 항전하는 쪽을 택하였다.

 

하지만 그도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불과 반년 후인 서기 9년 여름 4월에 그 두 성도 최종적으로 백제에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최소한 마한의 수도 인근의 저항은 분쇄되고 말았다. 백제는 그 두 곳의 주민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이주케 하여 아예 저항의 싹을 잘라버렸다. 그리고는 끝으로 마한의 수도였던 지역을 금마저(金馬渚)로 개명하였다. 오늘날 전북 익산의 옛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가 공식적으로 마한이 멸망한 시점이 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마한 전체가 일괄적으로 백제에 항복한 것은 또 아니었다. 이를테면 서기 16년 겨울 10월에는 마한의 옛 장수인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을 근거지로 삼아 백제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온조가 직접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토벌하였고, 결국 주근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음에도 그 시신의 허리를 베고 또 그의 가족도 연좌제로 처형시켰다. 잔인하리만치 철저했던 진압과정을 보면 백제 입장에서는 그만큼 마한의 부활이 큰 부담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시간이 흘러 서기 61년 가을 8월에는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들고 신라에 항복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마한의 수도가 무너졌던 것과 마한의 지방세력이 건재하였던 것이 마치 별개의 사건처럼 보일 정도로, 50년 이상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처럼 여전히 마한은 곳곳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한의 세력은 또 다시 60년이 흐른 뒤에도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21년부터 122년에 걸쳐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중국 한나라의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하였을 때에도 예맥(穢貊)과 함께 마한의 기병 총 1만 명이 등장한다. 비록 부여에서 왕자 위구태(尉仇台)가 그보다 더 많은 2만의 병력으로 한나라를 지원해준 탓에 실패로 돌아가고는 말았으나, 이 무렵까지도 마한의 망명세력은 북쪽으로 백제를 넘어 고구려 남부 영토 어딘가에 멀쩡히 잔존하고 있었던 셈이다.

 

<삼국사기>의 찬자는 이를 보고 이미 멸망했던 마한의 부흥세력이 참전한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실제로 아주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그 소멸의 시점을 특정할 수는 없으나 마한은 공식기록상으로는 서기 9년이 역사에서 퇴장한 해가 되지만, 잔존세력은 그 이후까지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역사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단 한 줄로나마 남기는 데 성공하였다.

 

고조선의 최후와 함께 이탈세력이 재건한 마한국, 그 끝은 비록 미약하였으나 그럼에도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 속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멸망 시점으로부터 치면 무려 9백 년 가까이 흐른 후에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이가 등장한다. 후삼국시대의 3대 영웅 중 한 명이 견훤(甄萱, 진훤)이 바로 그이다. 그가 완산주(完山州)에 들렀을 때 하였다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났고, 또 차례대로 진한과 변한이 그 뒤를 따라 일어났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는데…”

 

그는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였으나 그 기원을 마한부터로 잡았다. 금마저라는 공간도 마한의 것이었고, 백제는 그 역사를 이어받은 후신이었다. 그렇게 백제를 잉태하였던 고대왕국 마한은 고조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신화를 통해 시대를 뛰어넘어 끝내 역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후한서, 삼국지, 진서, 양서, 북사, 익산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영기, 신증동국여지승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