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 에스페란토

나의 SEK 입문기 (feat. 재능기부 편)

위클리 히스토리 2026. 9. 22. 15:03

은퇴 직후 무언가 유럽어(영어 빼고) 하나를 더 배우고자 하였는데, 그중 어느 특정 언어 하나만 고르기에는 왠지 아쉬움이 컸다. 심지어 고등학교 때 독일어, 스페인어 기초를 배워보았던 입장에서는 또 그 언어들이 가지는 난해한(?) 진입장벽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검색하다가 떠올린 것이 바로 에스페란토(Esperanto)였다. 여러 유럽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져서 기본적으로 친숙한 데다가, 문법적으로 불규칙이 없기에 처음 다가가기에 가장 수월한 언어가 바로 에스페란토였으니 말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배우느냐가 문제였는데, 처음에는 혼자서 책으로 독학을 시작해보았다. 한 달 해보니 기초책은 금방 뗄 수 있었지만 이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추가로 찾아본 곳이 바로 서울에스페란토문화원(Seula Esperanto-Kultrcentro(SEK), 이하 문화원)이었다. 

 

그렇게 나의 에스페란토 학습은 문화원과 함께 시작되었다. 멋모르고 찾아간 곳은 얼마 전까지 둥지를 트고 있었던 명동이었다. 6층의 낡은 건물 꼭대기에 자리잡은 문화원, 혹 조만간 건물이 무너지면 어떡하나 싶어 하면서 오른 그곳에 문화원이 있었다. 햇볕은 잘 들지만 기본적으로 건물의 노후화가 심해서 걱정 아닌 걱정이 드는 장소였다.

 

그럼에도 나의 에스페란토 학습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Ŝlosilo 원장님 지도 하에 기초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두 달의 입문과정을 끝마친 다음 Katrina 시리즈로 나아갔고, 또 연이어 율리안 모데스트(Julian Modest)의 단편집 한 권을 마무리하였다. 지금은 클로드 피롱(Claude Piron)의 Vere aŭ Fantazie로 학습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정확히는 무더운 여름마다 몇 달씩 중간에 쉬어가고 있긴 하다.)

 

그 사이 문화원도 기나긴 명동 시대를 마감하고 사당으로 이전해 와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무실도 훨씬 깨끗하고 높이도 기존의 6층보다 절반 낮은 3층이어서 부담이 적다. 두 곳 모두 햇볕이 잘 든다는 것은 크나큰 장점인 것 같다.

 

원래 회화는 딱히 관심이 없었고, 대신 워낙에 책을 좋아하고 글을 좋아하고 글자 읽는 것을 즐기다보니 매 시간이 재밌었다. 여기에 더해 개인 시간에 부가적으로 찾아본 것이 에스페란토 초창기 저작들이었다. 특히 영어권 화자들이 에스페란토를 처음 소개한 책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구텐베르크(Gutenberg) 프로젝트에 올라온 것들만 해도 다 볼 수 없을 만큼 방대했다. 그래도 공부 겸 해서 개인적으로 번역해본 것이 기초 문법서들인 헬런 프라이어(Helen Fryer)의 The Esperanto Teacher(에스페란토 선생님)와 젊은 시절의 에드몽 프리바(Edmond Privat)가 쓴 Esperanto at a Glance(한눈에 보는 에스페란토) 등이었다. (진달래출판사 덕분에 두 책 모두 시중에 출간되어 나와 있다.)

 

심지어 하다보니 약간의 과욕(?)이 생겨서 중간중간 에스페란토로 된 글을 한글로 옮겨본다거나, 어쩔 때는 아예 한글 원작을 에스페란토로 옮겨보는 도전적인 연습도 해보았다. 그렇게 모아온 원고가 어느 정도 되자 작은 책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부크크(Bookk) 등의 몇몇 POD 서비스를 이용해 아예 종이책의 형태로 만들어보는 시도까지 해보았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지금까지 시중에 종이책으로 나온 것들만 해도 날짜 순으로 그 이름을 나열해보면, <잃어버린 왕자(Perdita kaj retrovita)>, <김동인의 연개소문(Jon Gesomun)>, <발해고(BALHEGO)>, <어리석은 사람들(Nesaĝa Gento)>, <안데르센 이야기(Fabeloj de Andersen)>, <에스페란토 일상회화(Frazlibro de la Ĉiutaga Vivo)>, <한밤의 태양 아래(Sub la Meznokta Suno)>, <신채호의 을지문덕(Ulĝi Mundok)>, <홍길동 이야기(La Rakonto de Hong Gildong)>, <에스페란토 문법 기초(Specimens of Esperanto, with Grammar and Vocabulary)> 등 10여 권이나 된다.

 

뿐만 아니라 번역 외에도 단순히 에스페란토 원문을 편집하여 낸 <어린왕자 반스(Princo Vanc’)>나 <La Aventuroj de Alicio en Mirlando>같은 책들도 있다. 전자는 에스페란토+영어 버전이고, 후자는 에스페란토로만 된 책이다. (또한 시험 삼아 오로지 전자책으로만 낸 것들도 이외에도 여러 권이다.)

 

그러던 중 한국에스페란토협회(KEA)에서 하는 회화강습 코스에 등록하였는데, 자기소개 겸 발표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고 그때 POD 시스템의 이용방안에 대해 여러 에스페란티스토 분들께 소개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후 많은 분들이 문의를 해주셨고 기꺼이 상담을 일일이 다 해드렸으며, 아예 만나서 설명드리는 일도 물론 몇 번이나 있었다. 벌써 부크크를 이용해 학습교재를 여러 권 내신 분도 계시고 말이다.

 

아무래도 독자규모가 협소한 에스페란토 업계인 만큼 대량인쇄로 원가를 낮추는 방식인 기존 출판사를 통한 출간은 현실적으로 수익성을 담보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데, 마침 최신식 POD는 다품종 소량주문이 가능한 매우 합리적인 방식인 만큼 상대적으로 작은 시장규모의 에스페란토 업계와는 찰떡궁합일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내 고향인 문화원에서 원고를 책으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고 계셨는데, POD 출판으로 방향을 잡게 되면서 덕분에 재능기부(Pro Bono)를 할 수 있었다. 그 책이 바로 “250 Bonaj frazoj”(Bookk, 2026)이다. 이 책은 문화원에서 원장님이 오랜 기간 각종 출처로부터 좋은 문장과 글들을 뽑아서 총 250개로 묶어 만든 원고였는데, 오랫동안 파일로만 전해오다가 드디어 책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이 원고에 대한 어느 에스페란티스토의 깨끗한 육성 녹음파일도 전해지고 있으니 한 묶음으로 학습을 하기에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구매처는 당연히 문화원에서 직접 구매도 가능하고, 온라인서점으로는 부크크, 예스24, 알라딘 등이 있으며(가격은 모두 정가 2만원으로 동일하며, 대부분 배송비는 무료이다), 종이책 외에도 전자책 역시 함께 출간되었으니 비용 부담이 있거나(전자책은 1만원) 휴대성이 더 중요한 분들은 전자책 쪽으로 추천드린다. 전자책의 경우 현재까지는 부크크, 예스24까지 등록되어 있으며, 알라딘도 조만간 올라올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