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비트코인(Bitcoin)의 위상은 남다르다. 전세계 모든이들이 그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고, 일부는 그것에 투자하여 막대한 부를 쌓기도 하였다. 비트코인같은 가상화폐를 실제 화폐로 볼 것인지 여부는 여전히 논란거리이지만, 최소한 자산가치가 있다는 사실은 공히 인정받는 정도에는 이른 것으로 보인다. 가치의 변동폭 때문에 재화와 용역과의 교환가치를 가진 화폐로 활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최소한 이 가상자산에 투자하였다가 차익실현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은 원래 그렇게 처음 설계된 대로 잘 발전해오고 있는 것일까?
의외로 비트코인 투자자들이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정확히는 자산가치의 투자 목적으로만 바라보는 절대다수의 대중들에게는 관심사항 자체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왜” 비트코인이 탄생하게 되었는지이다. 사실 비트코인을 처음으로 다룬 사토시 나카모토(Satoshi Nakamoto)의 논문은 9페이지에 불과하다. 마치 에스페란토의 개요를 정리한 자멘호프의 제1서를 보는 느낌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자신이 왜 비트코인을 기획하게 되었는지 아주 짤막하게 배경을 설명하고는 나머지 분량은 기술적인 설명에 할애한다. 논문 치고는 상당히 쿨한 방식이라고 할 만하다.
요약하자면 비트코인은 중앙정부 내지 은행이 가지는 화폐의 발행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한다. 그래서 P2P라고 약칭하는 개인간 거래증명방식을 통한 가상화폐의 이동을 블록체인 방식으로 구현한다는 것이 논민의 요지이다. 비트코인은 그에 대한 대가로서 블록체인의 정합성 여부를 증명하는 데 리소스를 들이는 개인들에게 고정 로직에 따라 주는 일종의 리워드이다. 굳이 정치로 비유하자면 중앙집권적 방식에서 개인에게 주권을 돌려주겠다는 일종의 혁명적 선언과도 같이 보이는 측면도 있다. 물론 선의로서 그렇다는 말이다.
문제는 지금의 비트코인은 당초의 선한(?) 목표와는 완전히 괴리되어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창안자는 원래 화폐를 자기 마음대로 찍어대는 정부와 은행에 불만을 가지고 비트코인을 기획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 부분 자체도 화폐의 역사와 본연의 역할을 잘 모르는 개발자 출신의 문제의식부터 한계를 가지고 있다. 범위를 벗어나기에 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여하튼 오늘날 창안자의 원래 의도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크게 보면 거대한 자본주의의 탐욕, 그리고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익명성에 기반한 암시장과 돈세탁의 활로로 오용된다는 점 등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탐욕과 부작용이 있기 전에는 비트코인도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다. 개발자들의 놀이감처럼 활용되던 시절 말이다. 소수의 선한 이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기술적으로 이를 구현하기 위해 다루던 시기가 있었다. 그것이 가상이든 실물이든 간에 화폐는 본질적으로 다수의 교환가치에 바탕을 두기에 “소수”만 인지하고 활용하던 시기의 비트코인은 자산가치는커녕 말 그대로 온라인 게임 내의 포인트 정도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극단적으로 확산되고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점은 “돈”과 결부되기 시작하면서였다. 돈의 속성상 돌기 시작하면서 비트코인도 시장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여기에 블록체인 기술 등이 (대개는 내용도 잘 모르지만) 미래 가치로 급부상하며 긍정적/낙관적 포장까지 갖추게 되면서 온갖 방향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물론 이 또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각국의 현금이 시장 활성화를 명목으로 엄청나게 풀리면서 넘쳐나기 시작했고, 동시에 고수익 투자처가 마땅치 않던 시절이었기에 비트코인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점은 다들 잘 모르는 배경이지만 말이다.

정리하자면, 순수한 의도는 소수일 때나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것이 다수가 된다는 것은 온갖 다른 생각들을 가진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 순간 본질적인 의도나 목표 따위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만다. 남는 것은 수많은 이들의 제각각의 욕심과 저마다의 활용일 뿐이다.
비트코인의 역사는 20년도 채 되지 않지만 그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의 에스페란토는 총기간은 거의 1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모습만 놓고 본다면 여전히 비트코인의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다. 좋은 의도를 가진 소수의 목적이자 수단으로서 말이다.
에스페란티스토들이 모이면 특유의 분위기가 풍긴다. 출신성분은 서로 다 다양하지만 하나의 수단을 매개로 한다는 자신들만의 애착심같은 그런 것이 있다. 그것을 즐기는 이들이 다수이기에 에스페란토 모임에 나가보면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새로 챙기는 그런 문화도 보기 좋게 남아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내 집에 공짜로 묵게 해준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지만, 에스페란티스토 사회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외국인을 내 집에 재워주는 것이 의외로 잘 통하는 게 에스페란토 세계이다. 더욱이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이 다들 나서서 나를 지역 관광까지 시켜주는 것 또한 에스페란토 문화에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모습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이 “소수”이기에 초기부터의 순수한 의도가 기능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비트코인 초기의 순수했던 교류처럼 말이다. 만약 에스페란토가 지금보다 더 많이 활성화되고 더 널리 사용되는 단계로 진화 발전한다고 하였을 때에도 과연 그런 문화가 가능할지를 묻는다면, 솔직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즉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도 처음의 의도는 비교적 순수했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맞지 아니하여…”로 시작하는 훈민정음은 어려운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쉬운 글자를 도입한다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수월한 행정처리 등의 국가적/사회적 이익은 둘째 치고 말이다. 그런 한글이 지금은 욕설을 적을 때도, 서로 글로 싸울 때도, 심지어 협박 편지가 되었든 소송 서류가 되었든 온갖 용처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것이 순수함을 벗어났다고 하여 문제일까? 보편적 사용을 위해서는 순수함에 대한 고집은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에스페란토도 만일 보편적 사용이 목표라고 했을 때에는 그것으로 욕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사기도 치고 온갖 말썽을 다 일으키는 용도로 활용되어야지만 그 목표를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세계평화와 같은 옛 미스 유니버스급 드립은 안타깝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트코인이 지금의 성공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온갖 불순한 기운들까지 죄다 그것에 달려들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만약 한글이 선한 내용만 담도록 설계되고 그 용도로만 제약된 글자 체계였다면, 솔직히 오늘날의 현대 한국인들은 여전히 한자를 쓰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비트코인이 돈세탁이 되었든 암시장이 되었든 말 그대로 열린 용처가 있었기에 지금의 비트코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에스페란토는 스스로 선한 목적을 추구하는 “소수”의 전유물로 남아 여행과 친목의 수단으로서 고착화되어 그것에 딱히 공감하지 못하는 젊은층의 외면을 받고 계속해서 축소지향의 길을 걸게 될지, 아니면 초기의 모습을 어찌되었든 탈피하여 누구나 사적 욕망과 돈벌이에도 활용되는 무궁무진한 용도로의 확장을 통해 새롭게 거듭날 수는 없을지 고민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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