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5

발해와 요동반도

발해가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못하였다는 주장들이 있다. 한번 그 근거가 되는 것들부터 살펴보고 넘어가보자. 가탐(賈耽)의 지리 기록가탐은 8세기 후반에 활동한 당나라의 관료였다. 고구려 유민인 왕사례(王思禮)와도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하지만 그가 유명한 것은 관료로서의 업적보다는 개인적으로 지리학을 무척 좋아해서 관련된 지리책과 지도까지 편찬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저작은 없지만 다행히 의 지리지에 그의 글이 다수 남아 있다. 그렇게 우연찮게 발해에 대한 지리 정보도 그의 글을 통해 일부가 전해진다. 등주(登州, 산동반도 동북쪽 끝)에서 동북쪽 바닷길로 압록강 하구에 이른다. 배를 타고 1백여 리를 가서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타고 30리를 거슬러 올라가 박작구(泊勺口)에 도착하니 발해의..

발해는 고구려인가 말갈인가?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 국가인가, 아니면 말갈족 최초의 국가일까? 사실 이는 학문적인 질문으로 봐야 하지만 거의 대부분 정치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인다. 발해에 대해서는 남과 북이 거의 한 목소리로 고구려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중국에서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정치적 해석을 하며, 러시아에서는 고민 없이 말갈인들의 나라라고 말할 것이다. 이 중에 일본은 유일하게 발해와 영토적으로는 겹치지 않지만, 만주국 시절의 깊은 연관성 때문에 이들도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은 후대에서 과거로 시간흐름을 역으로 밟아나가는 순간 일종의 경향성, 혹은 고정관념 내지 편견이 생긴다는 점이다. 소위 ‘답정너’처럼 마음 속으로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거슬러 올라가봤자 내가 보고 싶어하..

발해의 후예, 정안국 혹은 올야 이야기

발해는 거란군의 고도의 기동작전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926년 2월 19일에 멸망하였다. 그리고 모든 역사가 그렇듯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각지에서 펼쳐졌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이들의 무수한 활동이 있었겠지만 (거란에 의해 세워진 기미국(羈縻國)인 동거란국(東丹國)을 제외하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발해의 계승국가는 정안국(定安國)이다. 발해 역사를 좋아하는 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그 유명세에 비해 구체적인 정보는 놀라우리만치 거의 없다. 심지어 언제 건국되었는지, 역대 국왕들의 계보는 어떻게 되는지, 그래서 언제 멸망하였는지조차 아무런 정보가 없다. 마치 발해의 역사를 찾아나갈 때 눈을 가리고 코끼리를 더듬더듬 만져가며 그림을 그려나가야 하듯이, 그 후예인 정안국 역..

BALHEGO(渤海考) - Historio de Balhe Regno

Enkonduko de la Aŭtoro Gorjo(高麗) Regno ne sukcesis fariĝi potenca lando, ĉar ĝi ne skribis la historion de Balhe Regno. Prae estis Gogurjo(高句麗) Regno norde, Bekĝe(百濟) Regno sudokcidente, kaj Sinla(新羅) Regno sudoriente. Estus kompreneble verki la historion de la tri regnoj, kaj estis prave ke Gorjo faris tion. Kiam antaŭe Bekĝe disfalis kaj ankaŭ Gogurjo ruiniĝis, Sinla posedis la sudan teritorio..

Semajna Historio 2025.12.10

발해가 발해인 이유

714년 5월 18일, 한 무리의 당나라 사신들이 요동반도 끝자락에서 배를 타기 전에 돌에 글을 새겼다. 근처에는 이를 기념하여 미리 파둔 두 개의 우물도 있었다. 사신의 대표는 홍려경(鴻臚卿) 최흔(崔忻)이라는 인물로, 바로 전 해에 당나라에서 발해로 파견되어 외교업무를 수행하고 이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보다 몇 년 전에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이 먼저 발해에 사신으로 온 적이 있었고, 그를 따라서 대조영이 들째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나라로 보냈었다. 그 아들이 이번에 최흔과 함께 발해로 돌아온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우물은 없어졌지만 이 돌만큼은 1,200년 가까이 지나서까지도 그곳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이 승리하자 기념물로 이 돌을 강제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