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ajna Historio

오늘날 에스페란토와 그 현실

위클리 히스토리 2026. 2. 23. 22:37

에스페란토(Esperanto)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한 세기도 훨씬 전인 1887년에 L. L. 자멘호프(Zamenhof)가 창안한 인공어(Constructed Language, 보통 줄여서 Conlang)입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살았던 오늘날 폴란드의 비알리스토크(Bialystok)라는 도시는 4개 민족이 동시에 거주하였던 곳으로, 당연히 언어를 비롯해 너무도 다른 문화적 차이로 인해 서로 반목하기 일쑤였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자멘호프는 인류의 평화에는 서로 다른 점을 이해할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간절히 느꼈고, 이를 위해 공통 언어의 필요성을 이미 진작에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에스페란토라는 언어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여러 기존 인공어들도 참고하였고, 또 고대의 공용어였던  라틴어도 검토하였지만, 결론적으로는 무수히 많은 불규칙과 온갖 예외적인 특성들 때문에 누구나 어려움 없이 배우기에는 한계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 그에게는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문법을 단순화하고 어휘 또한 창의적인 조어 방법론을 도입하여 간단하게 만들어서 내놓은 것이 에스페란토였던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그 이름을 알리게 된 에스페란토는 20세기 초경에는 나름 유럽에서 유명세를 탔고 꽤 탄탄한 지지세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유럽 기반이긴 하였으나 심지어 극동의 한중일 나라들까지도 별로 시간차를 두지 않고 이 언어가 인기를 끌 수가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새로운 국제 공용어인 에스페란토의 매력에 빠져 어느 정도씩은 배웠다는 사실도 꽤 알려져 있습니다.

 

인구밀도 대비 에스페란토 화자 비중 - Vikipedio

 

하지만 1백 년도 더 지나 21세기가 된 현재는 어떨까요? 아마 젊은 세대들은 아예 들어본 적도 없을 테고, 좀 더 나이가 있는 세대라 할 지라도 아주 오랜만에 들어봤다는 반응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에스페란토는 21세기도 어느덧 4분의 1이 더 지난 오늘날 그 나이만큼이나 실제로 고령화를 겪고 있는 언어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배우지 않고 예전 배운 사람들만 현상유지를 하고 있으니 사용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에스페란토의 몇 가지 본질적인 특성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멘호프가 처음 고안하였을 때의 목표를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공통 언어를 통한 평화 실현, 누구나 배우기 쉬운 문법과 어휘 구조, 그리고 모국어는 그대로 둔 채 국제 공용어 내지 보조어로서의 기능 등이 그것입니다.

 

차례대로 살펴보자면, 우선 공통 언어, 즉 세계 공용어(Lingua Franca)라고 하면 오늘날 다들 무엇을 가장 많이 떠올릴까요? 맞습니다, 영어(English)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조차 권력자의 자제들에게 영어를 배우게 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우스갯소리로 반미에 좌파 이념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던 운동권들조차 자기 자식들은 결국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게다가 사실 우리도 일상에서 피부로 많이 느낍니다. 어차피 절대다수가 영어가 미숙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조차 외국인을 만나면 가장 먼저 시도하는(?) 제1외국어가 곧 영어이니까 말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를 여행 가서라도 결국 그들이 외국인을 만나면 곧바로 의사소통하기 위해 어설프게나마 꺼내는 언어도 영어입니다. 이미 세계 공용어가 사실상 영어로 통일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이 되었든 유튜브가 되었든 AI가 되었든, 결국 절대량의 데이터가 생산되고 또 활용되는 기반 역시 영어입니다. 이미 또 다른 대체 언어가 필요없을 만큼 영어가 사실상(de facto) 세계 공용어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전세계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새롭게(물론 그조차 1백 년 훨씬 이전이긴 하지만) 중립적인 공용어가 필요하다고 하여 그것을 반기기가 물리적으로 힘들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상황입니다. 진화론의 개념을 일부 차용하자면, 가장 최적의 언어여서 영어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이 아니라 가장 환경에 잘 적응하였기에(국제정치든 자유경제든 어떤 의미로든 간에) 그 언어가 오늘날 인류사회에서 사실상의 공용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페란토가 그 발상부터 구조까지 영어보다 당연히 더 나은 점이 많다 하더라도, 이미 영어가 대세로 자리잡게 된 이후부터는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에스페란토는 세계평화를 위해 고안된 언어입니다. 그런데 그 발생 자체가 아무리 고귀하다 하더라도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가 됩니다. 이는 우리 주변만 살펴보아도 쉽게 그 근거가 무너집니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들조차도 온갖 이익, 이념, 지역, 학연, 혈연 등으로 각기 쪼개져서 아웅다웅 다투면서 살고 있는데, 과연 언어 하나를 통일시킨다고 하여 국제 분쟁이 갑자기 사라지게 될 거라고 그 어느 누가 함부로 주장할 수있겠습니까. 에스페란토가 탄생한 배경이 각자 고유한 배경을 가진 다양한 인종들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었기에 좀 더 언어라는 표상이 주목을 끌었을 거라고 여겨지긴 합니다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자멘호프가 기독교적 배경 하에서 바벨탑의 신화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더 나아가 에스페란토가 배우기 쉽다는 것 역시 상대적인 장점입니다. 에스페란토는 기본적으로 각종 유럽어에 기반을 둔 인공어입니다. 즉 문법부터 어휘까지 모두 유럽어적인 성격을 띌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직접 배워본 입장에서 감히 말씀드리자면, 한국인에게는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노력을 들인다고 가정하였을 때에는 일본어가 (최소한 초반에는) 좀 더 빨리, 좀 더 수월하게 익히기 좋은 언어입니다. 예컨대 모르는 일본어 단어라도 대충 우리식 한자 발음을 일본어스럽게 발음만 해도 대충 상대방이 알아듣는 신기한 경험도 할 수가 있고, 또 이를테면 “하지 않으면(なければ) 안 된다(ならない)”는 문법처럼 거의 서로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보니 굳이 복잡하게 문법적 설명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우리가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일본어입니다. (물론 우리말도 복잡한 존대말 때문에 외국인들이 배울 때 허덕이는 것처럼, 중급 이상 넘어가면 일본어도 난이도가 확 올라가는 단점이 있습니다.)

 

설혹 에스페란토를 빠르게 배우는 경우에도 사실 우리가 학창시절에 영어라는 S-V-O 구조의 언어를 미리 배웠었고, 거기에 영어 역시 보편적인 유럽어에 기반한 문화에서 성장한 언어이기에 어느 정도 어휘도 비슷한 측면이 있어서 그렇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어떠한 유럽어도 배워본 적이 없는 우랄-알타이어 계통의 화자가 에스페란토를 배운다면 과연 “쉽다”라는 평가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에스페란토가 유럽 중심임을 보여주는 분포도(Pasporta Servo) - Vikipedio

 

우리가 흔히 하는 실수로, 자신도 모르게 보고 싶은 현실만 보는 점은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에스페란토가 아무리 그 의도가 순수하고 실제로 문법과 어휘가 쉬운 편에 속하더라도, 당초의 취지에 어울리는 위상을 가지기에는 이미 적기를 놓쳤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굳이 누구의 탓을 할 수는 없겠지만, 여하튼 지금의 현실은 과거의 수많은 변화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입니다. 영어가 최고의 언어여서 세계를 재패하게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에스페란토가 완벽하니 모든 인류에게 가장 적합하다는 것 또한 논리적으로 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냉정하지만 현실은 현실입니다.

 

저한테는 에스페란토가 굳이 비유하자면 20세기의 라틴어같은 언어입니다. 새로 외국어를 배워보고자 하였을 때, 영어 외에 특정 유럽어를 배우기에는 그외의 다른 유럽어는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 때문에 쉽게 선택할 수가 없던 상황에서, 그렇다고 한때 유럽을 석권하였던 고대 라틴어는 오늘날에도 배우기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기에 시도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럴 때 다가온 것이 에스페란토였습니다. 특정 유럽어 하나를 선택하지 않더라도 그 공통된 특성들을 어느 정도 반영하여 어휘도 단순하고 문법고 간단한 축에 속하는, 그러면서 라틴어와는 달리 아직까지도 그 언어의 화자와 그 언어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있는 에스페란토라면 외국어 학습 버킷리스트에 넣기에 부담이 없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에스페란토는 재미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영어를 어느 정도 배운 경험이 있다면 그에 파생해서 새로 배울 때에 진입장벽이 낮아지는 효과도 있고, 우리한테는 익숙치 않은 4성의 성조에 넘쳐나는 간체자를 모조리 암기해야 하는 중국어보다 쉽고, 결코 원어민 수준은 익힐 수 없겠구나 하는 마음에 중간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어에 비하면 중간에 갑자기 확 난이도가 뛰지 않는 에스페란토가 상대적으로 쉬울 수 있습니다. 또한 세계평화나 공용어 내지 보조어와 같은 욕심 혹은 진지함만 내려놓는다면 에스페란토는 좀 더 쉬운 유럽어 하나를 나의 사용 가능한(available) 외국어 리스트에 올리는 데 꽤나 적합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마치 친목모임의 매개체로 그 위상이 많이 쪼그라든 모양새이지만, 실제로 언어적으로 실용적 완성도가 높은 에스페란토는 하나의 다가가기 손쉬운 외국어 정도로 인식하고 받아들인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굳이 인류인주의(Homaranismo)와 같은 위대한 이상이 아니더라도, 단순히 재미를 위해 외국어 하나쯤 배워두고 싶은 분들께는 그래서 강추해드립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에스페란토가 곧 이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복잡하고 불필요한 문법을 걷어내고 하나의 청정 언어로서 배우고 익히다보면 그 과정에서 나름의 신선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에스페란토입니다.